산하의 오역
2002.12.2 로또 발매 시작
어렸을 적 복권의 대명사는 주택복권이었다. 준비하시고 쏘세요 하면 화살을 날려 돌아가는 원판에 꽂고 기운찬 남자 목소리가 '6번이오'를 알려 주던 그 프로그램의 최고 당첨 금액은 3천만원이었던 기억이 난다. 그 뒤에 올림픽 복권이 등장하면서 복권 상품 금액은 비약적으로 증가하여 1억을 헤아리게 된다. 이후 복권계에 또 하나의 쓰나미가 몰려온 것이 2002년12월2일의 일이었다. 로또라는 이름의 복권이 등장한 것이다.
로또의 행운으로 인생대역전을 이룬 이들은 이미 수천 단위에 이를 것이다. 어느 경찰서에 근무하던 경찰관이 터뜨린 400억의 대박부터 소소한(?) 10억짜리 행운까지, 그 행운을 거머쥔 이들은 매스컴이나 주위 사람들의 집요한 추적의 대상이 되기도 했고 허다한 믿거나 말거나성의 루머에 사달리기도 했다. 그리고 그렇게 큰 행운의 후폭풍은 만만하지도 않았다. 로또 취재 중 건너 건너 들었던 이야기들은 어이없는 것들이었다. 포스코 정규직으로 잘 다니던 동생이 아예 사표를 내 버리고 배수진을 친 채 돈 달라고 찾아왔다든가, 사돈에 팔촌까지 '공돈' 덕 좀 보자고 달려드는 데에 "그냥 내 형이 당첨되고 그 돈을 내가 얻어쓰는 게 낫겠다"면서 절규했다든가.
그 1등들을 취재하라는 명을 받았지만 결국은 단 한 사람도 만나지 못했다. 행여 머리카락 보일까 꼭꼭 숨어버린, 또는 이미 인생역전을 이뤄 구름 위로 올라가 버리신 1등 당첨자들의 그림자 옷깃에도 스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내가 만나고 싶은 이는 따로 있었다.
그는 울산의 40대 회사원이었다. 로또 2등에 당첨되어 3천1백만원 정도를 받았던 그는 "친구한테 복권 되면 천만원 주기로 약속했다"는 이유로 천만원을 줬고 나머지 2천1백만원은 희귀병을 앓고 있는 여자 아이에게 전달함으로써 자그마한 화제를 낳았던 것이다. 즉, 그는 로또 2등이라는 준 중박을 맞고도 단 한푼도 자기가 갖지 않은 거다
그가 사는 곳은 울산에서 도저히 잘나간다고 볼 수는 없는 동네의 언덕빼기에 서 있는 한동 짜리 맨션이었습니다. 요즘 세상에 돈 3천만원이 아무리 값어치가 떨어졌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요긴하게 쓰자면 그 허름한 맨션에서 보다 깔끔한 곳으로 옮길 정도는 넉넉히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왜 그랬는가. 왜 굴러들어온 호박을 넝쿨째 차 버렸는가.
궁금증으로 숨이 턱에 닿은 질문에 비해 아저씨의 질문은 생뚱맞을만큼 천연덕스러웠다. “친구가 농담으로 로또 되면 좀 달라고 했을 때 돈 천만원 준다고 했으니 준 거고, 울산방송에서 너무 불쌍한 아이 이야기가 나오길래 그냥 준 거”라는 것.
뭔가 특별한 사연이 있을 것이다, 그런 선행을 베푼 데는 뭔가 가슴 아련한 뒷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여겼던 제 기대는 산산히 부서지고 말았다. 이씨 뭐 이래
“부인이 반대하지는 않으셨나요?”
“아니오. 그러자니까 그러자던데요.”
“아들은?”
“그냥 그러자니까 박수 치고 그랬어요.”
그렇다곷머리에 광배 하나 두른 것 같은 성인군자의 가족은 절대 아니었다. 그저 지하철에서 출퇴근시 꾸벅꾸벅 졸며 만날법한 평범한 아저씨와 그 가족들이었다. 뭔가 이유가 있으리라 왜? 왜? 왜? 기를 쓰고 파고드는 PD의 인파이팅에 그분은 무척 건조한 카운터 펀치를 날려 왔다.
“내 것 같지 않더군요. 복권을 사긴 샀는데 그렇게 거금이 떨어지니까 내 것 같지 않더라고. 그래서 버려 버렸죠. 버리니까 그렇게 마음이 편하데...... 경상도 사람들은 그런 말을 가끔 하죠.
‘강구야~~~’”
아마도 ‘광고야~~’에서 변형되었을 듯한 ‘강구야~~’라는 말은 그쪽 지역 꼬마들이 이사를 가거나 하여, 인심을 쓰고 싶거나 하여 딱지나 구슬 등등을 동네에 뿌리고 싶을 때 부르짖는 단어다. 결국 아저씨는 돈 3천만원을 ‘강구야~~’ 했다는 것이다.
아저씨와 그 부인이 뭔가를 내밀었습니다. 그것은 아저씨가 익명으로 전달한 돈을 받은 희귀병 환아의 어머니가 쓴 편지였다. ‘대체 이 은혜를 누구에게 고마워해야 합니까.......’ 즉 이 부부는 성금 전달시 철저하게 익명을 요구했었고 환아의 어머니가 은인들이 누구인지나 알게 해 달라고 그 편지를 방송국에 보내 호소했을제에야 그 정체를 밝혔었다. 그것도 아주 잠깐.
하지만 그 편지를 내미는 부부의 얼굴만큼은 그때껏 얼굴을 지배하던 쑥스러움을 벗어 던진 자랑스러움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때 부인은 이렇게 중얼거렸다.
“우리가 언제 이런 사람이 한 번 돼 보겠어예. 누구한테 이래 고마운 사람 돼 봤어예?”
그들은 그 이후로도 계속 그 아이와의 인연을 끊지 않고 있었다. 겨울에 가스 들여놔 주고, 명절에는 과일로 인사치레를 했다. 그 와중에 또 로또 3등이 당첨됐다. 이번에는 그 아이의 집에 에어콘 하나를 놓아 주었다. 남들은 한 번 되기도 어려운 복권을 두 번씩이나 맞은 것도 신기한 일인데, 그걸 또 남 좋은 일에 썼다는 이 대책없이 신기한 사람들은 그게 ‘신이 났다’고 했다. 그리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판에 박힌’ 말을 했습니다. 조금만 버리면 마음이 편하다는 것이었다.
문득 그 생각이 났다. 이 아저씨는 철저하게 취재를 거부해 왔었다. 어떤 프로그램은 문앞까지 가서도 못들어갔고 어떤 프로그램은 숫제 시사프로그램의 제보자 필 나는 "다리만 나오는 인터뷰"로 만족해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선선히 인터뷰에 응하게 된 것일까.
“혹시 방송에 나오면 그 아이한테 도움이 될까 봐서요. 아직 치료비가 많이 들어가거든. ARS 같은 거 혹시 안되나?”
그렇게 아저씨는 또 한 차례 자신을 버리고 있었다.
2002년12월2일 마흔 다섯 개 중 여섯 개의 숫자를 고르는 로또가 발매 개시됐다. 그 공식 명칭은 '나눔 로또'였다. 내년으로 10년을 맞게 되는 로또의 역사에서 나는 작은 자긍심 하나를 갖는다. 나는 가장 크게 나누었던 사람을 만났다.
2002.12.2 로또 발매 시작
어렸을 적 복권의 대명사는 주택복권이었다. 준비하시고 쏘세요 하면 화살을 날려 돌아가는 원판에 꽂고 기운찬 남자 목소리가 '6번이오'를 알려 주던 그 프로그램의 최고 당첨 금액은 3천만원이었던 기억이 난다. 그 뒤에 올림픽 복권이 등장하면서 복권 상품 금액은 비약적으로 증가하여 1억을 헤아리게 된다. 이후 복권계에 또 하나의 쓰나미가 몰려온 것이 2002년12월2일의 일이었다. 로또라는 이름의 복권이 등장한 것이다.
로또의 행운으로 인생대역전을 이룬 이들은 이미 수천 단위에 이를 것이다. 어느 경찰서에 근무하던 경찰관이 터뜨린 400억의 대박부터 소소한(?) 10억짜리 행운까지, 그 행운을 거머쥔 이들은 매스컴이나 주위 사람들의 집요한 추적의 대상이 되기도 했고 허다한 믿거나 말거나성의 루머에 사달리기도 했다. 그리고 그렇게 큰 행운의 후폭풍은 만만하지도 않았다. 로또 취재 중 건너 건너 들었던 이야기들은 어이없는 것들이었다. 포스코 정규직으로 잘 다니던 동생이 아예 사표를 내 버리고 배수진을 친 채 돈 달라고 찾아왔다든가, 사돈에 팔촌까지 '공돈' 덕 좀 보자고 달려드는 데에 "그냥 내 형이 당첨되고 그 돈을 내가 얻어쓰는 게 낫겠다"면서 절규했다든가.
그 1등들을 취재하라는 명을 받았지만 결국은 단 한 사람도 만나지 못했다. 행여 머리카락 보일까 꼭꼭 숨어버린, 또는 이미 인생역전을 이뤄 구름 위로 올라가 버리신 1등 당첨자들의 그림자 옷깃에도 스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내가 만나고 싶은 이는 따로 있었다.
그는 울산의 40대 회사원이었다. 로또 2등에 당첨되어 3천1백만원 정도를 받았던 그는 "친구한테 복권 되면 천만원 주기로 약속했다"는 이유로 천만원을 줬고 나머지 2천1백만원은 희귀병을 앓고 있는 여자 아이에게 전달함으로써 자그마한 화제를 낳았던 것이다. 즉, 그는 로또 2등이라는 준 중박을 맞고도 단 한푼도 자기가 갖지 않은 거다
그가 사는 곳은 울산에서 도저히 잘나간다고 볼 수는 없는 동네의 언덕빼기에 서 있는 한동 짜리 맨션이었습니다. 요즘 세상에 돈 3천만원이 아무리 값어치가 떨어졌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요긴하게 쓰자면 그 허름한 맨션에서 보다 깔끔한 곳으로 옮길 정도는 넉넉히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왜 그랬는가. 왜 굴러들어온 호박을 넝쿨째 차 버렸는가.
궁금증으로 숨이 턱에 닿은 질문에 비해 아저씨의 질문은 생뚱맞을만큼 천연덕스러웠다. “친구가 농담으로 로또 되면 좀 달라고 했을 때 돈 천만원 준다고 했으니 준 거고, 울산방송에서 너무 불쌍한 아이 이야기가 나오길래 그냥 준 거”라는 것.
뭔가 특별한 사연이 있을 것이다, 그런 선행을 베푼 데는 뭔가 가슴 아련한 뒷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여겼던 제 기대는 산산히 부서지고 말았다. 이씨 뭐 이래
“부인이 반대하지는 않으셨나요?”
“아니오. 그러자니까 그러자던데요.”
“아들은?”
“그냥 그러자니까 박수 치고 그랬어요.”
그렇다곷머리에 광배 하나 두른 것 같은 성인군자의 가족은 절대 아니었다. 그저 지하철에서 출퇴근시 꾸벅꾸벅 졸며 만날법한 평범한 아저씨와 그 가족들이었다. 뭔가 이유가 있으리라 왜? 왜? 왜? 기를 쓰고 파고드는 PD의 인파이팅에 그분은 무척 건조한 카운터 펀치를 날려 왔다.
“내 것 같지 않더군요. 복권을 사긴 샀는데 그렇게 거금이 떨어지니까 내 것 같지 않더라고. 그래서 버려 버렸죠. 버리니까 그렇게 마음이 편하데...... 경상도 사람들은 그런 말을 가끔 하죠.
‘강구야~~~’”
아마도 ‘광고야~~’에서 변형되었을 듯한 ‘강구야~~’라는 말은 그쪽 지역 꼬마들이 이사를 가거나 하여, 인심을 쓰고 싶거나 하여 딱지나 구슬 등등을 동네에 뿌리고 싶을 때 부르짖는 단어다. 결국 아저씨는 돈 3천만원을 ‘강구야~~’ 했다는 것이다.
아저씨와 그 부인이 뭔가를 내밀었습니다. 그것은 아저씨가 익명으로 전달한 돈을 받은 희귀병 환아의 어머니가 쓴 편지였다. ‘대체 이 은혜를 누구에게 고마워해야 합니까.......’ 즉 이 부부는 성금 전달시 철저하게 익명을 요구했었고 환아의 어머니가 은인들이 누구인지나 알게 해 달라고 그 편지를 방송국에 보내 호소했을제에야 그 정체를 밝혔었다. 그것도 아주 잠깐.
하지만 그 편지를 내미는 부부의 얼굴만큼은 그때껏 얼굴을 지배하던 쑥스러움을 벗어 던진 자랑스러움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때 부인은 이렇게 중얼거렸다.
“우리가 언제 이런 사람이 한 번 돼 보겠어예. 누구한테 이래 고마운 사람 돼 봤어예?”
그들은 그 이후로도 계속 그 아이와의 인연을 끊지 않고 있었다. 겨울에 가스 들여놔 주고, 명절에는 과일로 인사치레를 했다. 그 와중에 또 로또 3등이 당첨됐다. 이번에는 그 아이의 집에 에어콘 하나를 놓아 주었다. 남들은 한 번 되기도 어려운 복권을 두 번씩이나 맞은 것도 신기한 일인데, 그걸 또 남 좋은 일에 썼다는 이 대책없이 신기한 사람들은 그게 ‘신이 났다’고 했다. 그리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판에 박힌’ 말을 했습니다. 조금만 버리면 마음이 편하다는 것이었다.
문득 그 생각이 났다. 이 아저씨는 철저하게 취재를 거부해 왔었다. 어떤 프로그램은 문앞까지 가서도 못들어갔고 어떤 프로그램은 숫제 시사프로그램의 제보자 필 나는 "다리만 나오는 인터뷰"로 만족해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선선히 인터뷰에 응하게 된 것일까.
“혹시 방송에 나오면 그 아이한테 도움이 될까 봐서요. 아직 치료비가 많이 들어가거든. ARS 같은 거 혹시 안되나?”
그렇게 아저씨는 또 한 차례 자신을 버리고 있었다.
2002년12월2일 마흔 다섯 개 중 여섯 개의 숫자를 고르는 로또가 발매 개시됐다. 그 공식 명칭은 '나눔 로또'였다. 내년으로 10년을 맞게 되는 로또의 역사에서 나는 작은 자긍심 하나를 갖는다. 나는 가장 크게 나누었던 사람을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