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1887년 7월 14일 에스페란토의 탄생
폴란드는 한국과 비슷하게 강대국 사이에서 얻어터진 역사가 즐비한 나라다. 강대국간의 세력 분할의 희생양이 되기 일쑤였고 동쪽의 곰 러시아는 장구한 세월 폴란드를 지배했다. 러시아는 자존심 강한 폴란드인들에게 러시아 어를 배울 것을 강요했고, 그래서 퀴리 부인의 어릴 적 이름인 "마리 스클로도프스카"가 러시아 장학사에게 러시아 어 시험을 당했던 일화가 폴란드로부터 ...머나먼 한국의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이 폴란드의 동북쪽의 도시 비아위스토크의 경우는 문제가 조금 더 복잡했다.
폴란드 땅이자 19세기 말 당시는 러시아 영토였으며 북쪽의 발트 해 국가들과도 가까웠고 유태인들도 적잖이 살아서 가히 종교와 언어의 전시장같은 곳이었다. 카톨릭교도인 폴란드인, 그리스 정교를 믿는 러시아인과 벨로루시인, 그리고 다른 곳에 비해 많았던 유태인들까지 얼키고설켜 살아갔는데 살아가는 품이 '오손도손'보다는 '아웅다웅' 쪽에 가까웠다. 시장에 가면 서로 다른 언어로 외쳐대는 상인들이 자리를 다퉜고 폴란드인들은 러시아 말을 쓰는 이들에게 분노의 눈길을 보냈고 러시아 인들은 대놓고 폴란드인들을 깔봤다. 그 틈바구니에서 유태인들은 이문을 챙겼고 가끔 거지들은 만국 공통어인 바디 랭귀지로 자비를 구했다. 종종 시비가 일어나면 러시아 헌병들이 들이닥쳐 고래고래 외쳐댔다. "러시아 어! 러시아 어를 써! 여기는 짜르가 다스리는 영토다."
바벨탑을 쌓던 인류에게 하느님이 불통(不通)의 벌을 내린 직후의 상황같은 이 비아위스토크에서 한 사람이 자라고 있었다. 이름은 루드비코 라자로 자멘호프. 그는 유태인이었다. 폴란드인이건 러시아인이건 벨로루시인이건 자기들끼리 치고박고 싸울지언정 딱 하나 공공의 적이 있다면 그건 유태인이었다. 유태인들이 별 것도 아닌 시비 끝에 폭행당하고 진창에 나뒹굴고 집에 돌팔매가 날아드는 일은 일상에 가까웠다. 그리고 5개 국어로 된 욕설도 동시에 쏟아졌다. 자멘호프의 예민한 영혼은 그 아픔에서 새로운 생각을 끄집어낸다. 이런 꿈이었다. “모든 민족 간의 증오가 사라지고, 언어와 국가는 그 사용자와 주민이 주인이 되며, 사람들이 서로 이해하고 서로 사랑하게 되는, 그런 행복한 시기"가 오리라는 것이었다.
민족간의 증오를 없애고 서로를 이해하게 만드는 것은 같은 언어를 쓰게 하는 수 밖에 없다. 어떻게? 유럽 각국 언어에 깊은 영향을 미쳤지만 지금은 사라진 라틴 어를 부활시킬 것인가? 언어도 예수가 아닌 사람과 같아서 죽은 자들 사이에서 부활하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방법은 새 언어를 만드는 것이었다. 어린 티를 채 벗어나지 않은 자멘호프는 학업 와중에 틈틈이 이 맹랑한 아이디어를 현실화하는데 몰두한다. 바벨탑 직후같던 비아위스토크의 유년 생활과 독일어 교사였던 아버지의 가르침으로 다양한 언어를 구사할 줄 알았던 그의 언어적 능력이 도움이 됐다.
그런데 1880년 자신이 공들여 작업한 원고를 들고 집에 돌아왔지만 러시아 정부의 독살스런 눈에 불온한 시도로 보일 것을 우려한, 그리고 아들의 몽상(?)이 싫었던 자멘호프의 아버지는 그 원고를 몽땅 불살라 버리고 말았다. 그 아버지의 걱정이 기우만은 아니었음은 1년 뒤의 대학살극으로 증명된다. 1881년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되자 그 범인이 폴란드인이었음에도 러시아 정부는 유태인에게 이 죄를 뒤집어씌웠고 러시아 정부가 유태인의 소행이라고 소문을 퍼뜨려 하루에 만 오천 여명의 유태인이 죽음을 당하는 비극이 벌어진 것이다. 바르샤바까지 밀어닥친 대학살에 자멘호프 일가는 지하실에 숨어 공포의 밤을 보내야 했다.
한때 시오니즘에 경도되기도 했지만 그는 팔레스타인인들의 반감을 깨닫고는 팔레스타인에 이스라엘 국가를 세우겠다는 시오니즘을 포기한다. 그 무렵 그가 유태교 경전을 인용하여 남긴 말이다. "하느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법률의 본질은 다음의 형태로 표현할수 있다. 가까이 있는 사람을 사랑하라 그리고 다른 사람이 당신에게 그렇게 해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당신도 다른 사람에 그렇게 하라. 그리고 그 행위들이 하느님의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라고 당신의 가슴속의 목소리가 말하면, 그러한 행위를 숨어서도 하지 말 것이며, 그 어느 때도 분명히 그 일을 하지 말라."
1887년 7월 14일 나이 스물 여덟의 안과 의사는 세계 공통어 '에스페란토'를 창안해 낸다. 그것은 가까이 살아가면서 서로 칼부림하고 미워하고 증오하는 사람들을 사랑하기 위한 그의 방식이었고,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대하듯 자신도 다른 사람을 대하고 싶었던 한 선량한 유태인의 노력의 산물이었고, 자신의 가슴 속에서 이것을 하라! 이것이 필요하다!고 말했을 때 아버지의 만류에도, 학살의 공포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일을 '분명히 했던' 한 사람의 업적이었다. 에스페란토라는 말은 '희망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자멘호프의 필명이었다. 그의 희망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P.S. 1887년 7월 26일을 발표일로 얘기하는 검색도 많다 ㅠㅠ )
1887년 7월 14일 에스페란토의 탄생
폴란드는 한국과 비슷하게 강대국 사이에서 얻어터진 역사가 즐비한 나라다. 강대국간의 세력 분할의 희생양이 되기 일쑤였고 동쪽의 곰 러시아는 장구한 세월 폴란드를 지배했다. 러시아는 자존심 강한 폴란드인들에게 러시아 어를 배울 것을 강요했고, 그래서 퀴리 부인의 어릴 적 이름인 "마리 스클로도프스카"가 러시아 장학사에게 러시아 어 시험을 당했던 일화가 폴란드로부터 ...머나먼 한국의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이 폴란드의 동북쪽의 도시 비아위스토크의 경우는 문제가 조금 더 복잡했다.
폴란드 땅이자 19세기 말 당시는 러시아 영토였으며 북쪽의 발트 해 국가들과도 가까웠고 유태인들도 적잖이 살아서 가히 종교와 언어의 전시장같은 곳이었다. 카톨릭교도인 폴란드인, 그리스 정교를 믿는 러시아인과 벨로루시인, 그리고 다른 곳에 비해 많았던 유태인들까지 얼키고설켜 살아갔는데 살아가는 품이 '오손도손'보다는 '아웅다웅' 쪽에 가까웠다. 시장에 가면 서로 다른 언어로 외쳐대는 상인들이 자리를 다퉜고 폴란드인들은 러시아 말을 쓰는 이들에게 분노의 눈길을 보냈고 러시아 인들은 대놓고 폴란드인들을 깔봤다. 그 틈바구니에서 유태인들은 이문을 챙겼고 가끔 거지들은 만국 공통어인 바디 랭귀지로 자비를 구했다. 종종 시비가 일어나면 러시아 헌병들이 들이닥쳐 고래고래 외쳐댔다. "러시아 어! 러시아 어를 써! 여기는 짜르가 다스리는 영토다."
바벨탑을 쌓던 인류에게 하느님이 불통(不通)의 벌을 내린 직후의 상황같은 이 비아위스토크에서 한 사람이 자라고 있었다. 이름은 루드비코 라자로 자멘호프. 그는 유태인이었다. 폴란드인이건 러시아인이건 벨로루시인이건 자기들끼리 치고박고 싸울지언정 딱 하나 공공의 적이 있다면 그건 유태인이었다. 유태인들이 별 것도 아닌 시비 끝에 폭행당하고 진창에 나뒹굴고 집에 돌팔매가 날아드는 일은 일상에 가까웠다. 그리고 5개 국어로 된 욕설도 동시에 쏟아졌다. 자멘호프의 예민한 영혼은 그 아픔에서 새로운 생각을 끄집어낸다. 이런 꿈이었다. “모든 민족 간의 증오가 사라지고, 언어와 국가는 그 사용자와 주민이 주인이 되며, 사람들이 서로 이해하고 서로 사랑하게 되는, 그런 행복한 시기"가 오리라는 것이었다.
민족간의 증오를 없애고 서로를 이해하게 만드는 것은 같은 언어를 쓰게 하는 수 밖에 없다. 어떻게? 유럽 각국 언어에 깊은 영향을 미쳤지만 지금은 사라진 라틴 어를 부활시킬 것인가? 언어도 예수가 아닌 사람과 같아서 죽은 자들 사이에서 부활하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방법은 새 언어를 만드는 것이었다. 어린 티를 채 벗어나지 않은 자멘호프는 학업 와중에 틈틈이 이 맹랑한 아이디어를 현실화하는데 몰두한다. 바벨탑 직후같던 비아위스토크의 유년 생활과 독일어 교사였던 아버지의 가르침으로 다양한 언어를 구사할 줄 알았던 그의 언어적 능력이 도움이 됐다.
그런데 1880년 자신이 공들여 작업한 원고를 들고 집에 돌아왔지만 러시아 정부의 독살스런 눈에 불온한 시도로 보일 것을 우려한, 그리고 아들의 몽상(?)이 싫었던 자멘호프의 아버지는 그 원고를 몽땅 불살라 버리고 말았다. 그 아버지의 걱정이 기우만은 아니었음은 1년 뒤의 대학살극으로 증명된다. 1881년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되자 그 범인이 폴란드인이었음에도 러시아 정부는 유태인에게 이 죄를 뒤집어씌웠고 러시아 정부가 유태인의 소행이라고 소문을 퍼뜨려 하루에 만 오천 여명의 유태인이 죽음을 당하는 비극이 벌어진 것이다. 바르샤바까지 밀어닥친 대학살에 자멘호프 일가는 지하실에 숨어 공포의 밤을 보내야 했다.
한때 시오니즘에 경도되기도 했지만 그는 팔레스타인인들의 반감을 깨닫고는 팔레스타인에 이스라엘 국가를 세우겠다는 시오니즘을 포기한다. 그 무렵 그가 유태교 경전을 인용하여 남긴 말이다. "하느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법률의 본질은 다음의 형태로 표현할수 있다. 가까이 있는 사람을 사랑하라 그리고 다른 사람이 당신에게 그렇게 해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당신도 다른 사람에 그렇게 하라. 그리고 그 행위들이 하느님의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라고 당신의 가슴속의 목소리가 말하면, 그러한 행위를 숨어서도 하지 말 것이며, 그 어느 때도 분명히 그 일을 하지 말라."
1887년 7월 14일 나이 스물 여덟의 안과 의사는 세계 공통어 '에스페란토'를 창안해 낸다. 그것은 가까이 살아가면서 서로 칼부림하고 미워하고 증오하는 사람들을 사랑하기 위한 그의 방식이었고,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대하듯 자신도 다른 사람을 대하고 싶었던 한 선량한 유태인의 노력의 산물이었고, 자신의 가슴 속에서 이것을 하라! 이것이 필요하다!고 말했을 때 아버지의 만류에도, 학살의 공포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일을 '분명히 했던' 한 사람의 업적이었다. 에스페란토라는 말은 '희망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자멘호프의 필명이었다. 그의 희망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P.S. 1887년 7월 26일을 발표일로 얘기하는 검색도 많다 ㅠ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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