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1950년 6월 15일 김수임 사형선고
“한 남자에 대한 사랑이 간첩의 죄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 재판장 육군 대령 김백일이 차갑게 말했다. 피고석에 선 여자는 무려 열 아홉가지 혐의로 고발되어 있었다. 미군 헌병 사령관 베어드의 동거녀였고 한 아이의 어머니였던 그녀는 베어드의 차로 남로당의 거물이었던 애인 이강국을 월북시키고 기밀을 빼내고 북에서 남로당에 보내는 정치자금을 전달하는 등 일대 스파이 ...행각을 벌였다는 것이 그녀의 죄목이었고, 김백일 대령은 사형을 선고한다.
1911년 개성에서 지지리도 못사는 집안의 딸로 태어난 김수임은 하시라도 빨리 입 하나 덜어야 했던 사연으로 11살에 민며느리로 들어간다. 신랑은 15살이었다. 하지만 시집살이는 혹독했고 남편은 철도 없고 경우도 없었다. 시집간지 4년만에 김수임은 야반도주를 하게 되는데 다행히도 미국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미국인 독신녀의 수양딸이 되어 성장한다. 이화여전을 다니면서는 시인 모윤숙 등과 친분을 나누게 되는데 어느날 모윤숙은 그녀에게 한 남자를 소개한다. 경성제국대학 법대생 이강국이었다. 그들의 첫만남은 함흥 감옥 면회실에서 이뤄졌다. 이강국은 원산 총파업 지원 활동을 하다가 옥고를 치르고 있었다. 둘은 첫눈에 스파크를 일으킨다. 다음날부터 김수임은 이강국의 겨울나기를 위한 옷을 뜨개질하고 있었다고 하니까.
하지만 이강국은 유부남이었고 독일로 유학을 떠나 버렸기에 둘의 사랑은 결실을 맺지 못했다. 해방될 무렵 김수임은 세브란스 병원장 비서로 일하고 있었는데 이 병원에 폐렴에 걸린 이강국이 입원하면서 둘은 광폭한 운명에 휘말리게 된다. 이강국의 본처는 세상을 떠난 뒤였고 “함흥에서 당신을 본 이후 한 번도 당신을 잊어 본 일이 없소.” 기차게 잘나고 인품도 훌륭해서 10년 뒤 대통령감이라는 극찬을 듣던 이강국의 사랑 고백에 김수임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함몰되어 버렸다. 둘은 동거에 들어갔지만 그 기간은 짧았다. 이강국이 북으로 간 후 종무소식이었던 것. 이후 그녀는 사교 클럽에서 만난 미군 24사단 헌병대장 베어드의 구애를 받고 동거하게 되고 아들까지 낳았다. 하지만 그녀에게 사랑은 어쨌건 이강국 뿐이었다.
이강국이 재차 남한에 내려와 활동하다가 체포령이 떨어졌을 때 미군 전용차에 숨겨 검문을 피한 후 월북시킨 것을 필두로, 이강국의 연락원을 여러 차례 자신의 집에 숨겨 주었고, 사형수였던 남로당 빨치산책 이중업을 빼내 북으로 보내기도 했으며 집에는 무기를 숨겨 두기도 했다(고 한다.) 간첩 행위를 한 것은 사실로 보이지만 그녀는 아무런 이념도, 정치적 동기도 없었다. 그녀를 그렇게 만든 것은 오로지 사랑이었다. 그의 후배였던 수필가 전숙희의 말은 안타까움이 세월을 넘어 뚝뚝 떨어진다. “수임이 언니는 사랑밖에 몰랐어요 너무너무 순진했지요. 자기가 한 일이 뭔지도 몰랐어요. 사람 목숨 하나 구해 준 게 무슨 죽을 죄냐고, 끝까지 그렇게 생각했으니까요.”
‘순진무구하고 사랑밖에 몰랐던 맹꽁이’의 꼬리는 쉽사리 수사 당국에 밟혔다. 하지만 미군 헌병대장의 집이란 언감생심 남한의 수사 기관이 쉽사리 치고 들어갈 곳이 아니었다. 이승만 대통령까지 나서서 역정을 낸 뒤에야 체포 작전이 실행되지만 그래도 미군 헌병대장 집에서 그 아이까지 낳은 여자를 끌고 나올 배짱은 돋아나지 않았다. 이때 등장하는 것이 또 한 번 모윤숙이다.
3월 5일은 모윤숙의 생일이었다. 모윤숙은 “미역국이라도 혼자 먹으려니 네 생각이 나는구나. 와서 같이 미역국이라도 먹자.”고 김수임을 불렀고 그 집 앞에는 수사진이 대기하고 있었다. 아무 것도 모른 채 미역국을 떠올리며 모윤숙의 집 앞에 이른 김수임은 삽시간에 눈이 가려지고 재갈 물려져 체포된다. 이후 재판과정에서 모윤숙은 “종달새라는 별명이 붙을만큼 명랑하고 성경도 열심히 읽는 수임이가 공산주의에 물든 것은 아니며, 첫사랑 때문에 피동적으로 저지른 것으로 관대한 처분을 바란다,”고 변호했는데 그 뒤 그녀가 쓴 일기를 보면 그 우정(?)이 좀 의심스러워지기도 한다. “수임은 사형이 분명했다. 나는 그 사형이 그릇된 것이란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내 친구 수임은 죽었다 벌써 죽었다. 이 지상에는 없는 수임이다. 저것은 사형을 받기 위해 만들어진 모조품이다.”
1950년 6월 15일 사형선고를 받은 (16일이라는 기록도 있다) 김수임은 전쟁이 터진 후 서울 함락 직전 한강 백사장에서 총살된다. 김수임의 체포 사실이 알려지자 남북 교환 인사 명단에 김수임을 넣어 김수임을 구출해 보려고 애썼던 이강국 역시 5년 뒤 이번엔 “미제의 간첩” 혐의로 북한에서 사형당한다. 똑똑하고 반듯했던, 그러나 이념의 구현자가 되기를 꿈꾸었던 한 남자와 명랑하고 사랑에 약했던 여자는 그렇게 역사의 격랑에 휘말려 갔다.
그런데 지난 2001년 AP 통신은 비밀 해제된 문서 가운데 이강국이 CIA의 협조자로 기록된 문서를 세상에 공개한다. 실제로 이강국이 ‘미제의 간첩’일 수도 있었던 것이다. 또한 김수임의 애인이었던 베어드 역시 그녀의 정체를 알고 있었고, 김수임을 통해 일종의 역공작을 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김수임의 아들이 양로원에 있는 베어드를 찾아갔을 때 베어드는 “I'm your father"가 아니라 ”네 아버지는 미스터 스미스“라는 기이한 말을 남긴다. 이쯤 되면 뭐가 뭔지 모르는 뒤죽박죽이 된다.
종달새처럼 재잘대기 좋아했던, 사랑에 목숨을 걸었을 뿐 이념 따위는 몰랐던 것으로 그녀를 아는 모두가 증언하는 한 여자가 1950년 6월 15일 죽음의 선고를 받는다.
사진은 세브란스병원근무시절의김수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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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15일 김수임 사형선고
“한 남자에 대한 사랑이 간첩의 죄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 재판장 육군 대령 김백일이 차갑게 말했다. 피고석에 선 여자는 무려 열 아홉가지 혐의로 고발되어 있었다. 미군 헌병 사령관 베어드의 동거녀였고 한 아이의 어머니였던 그녀는 베어드의 차로 남로당의 거물이었던 애인 이강국을 월북시키고 기밀을 빼내고 북에서 남로당에 보내는 정치자금을 전달하는 등 일대 스파이 ...행각을 벌였다는 것이 그녀의 죄목이었고, 김백일 대령은 사형을 선고한다.
1911년 개성에서 지지리도 못사는 집안의 딸로 태어난 김수임은 하시라도 빨리 입 하나 덜어야 했던 사연으로 11살에 민며느리로 들어간다. 신랑은 15살이었다. 하지만 시집살이는 혹독했고 남편은 철도 없고 경우도 없었다. 시집간지 4년만에 김수임은 야반도주를 하게 되는데 다행히도 미국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미국인 독신녀의 수양딸이 되어 성장한다. 이화여전을 다니면서는 시인 모윤숙 등과 친분을 나누게 되는데 어느날 모윤숙은 그녀에게 한 남자를 소개한다. 경성제국대학 법대생 이강국이었다. 그들의 첫만남은 함흥 감옥 면회실에서 이뤄졌다. 이강국은 원산 총파업 지원 활동을 하다가 옥고를 치르고 있었다. 둘은 첫눈에 스파크를 일으킨다. 다음날부터 김수임은 이강국의 겨울나기를 위한 옷을 뜨개질하고 있었다고 하니까.
하지만 이강국은 유부남이었고 독일로 유학을 떠나 버렸기에 둘의 사랑은 결실을 맺지 못했다. 해방될 무렵 김수임은 세브란스 병원장 비서로 일하고 있었는데 이 병원에 폐렴에 걸린 이강국이 입원하면서 둘은 광폭한 운명에 휘말리게 된다. 이강국의 본처는 세상을 떠난 뒤였고 “함흥에서 당신을 본 이후 한 번도 당신을 잊어 본 일이 없소.” 기차게 잘나고 인품도 훌륭해서 10년 뒤 대통령감이라는 극찬을 듣던 이강국의 사랑 고백에 김수임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함몰되어 버렸다. 둘은 동거에 들어갔지만 그 기간은 짧았다. 이강국이 북으로 간 후 종무소식이었던 것. 이후 그녀는 사교 클럽에서 만난 미군 24사단 헌병대장 베어드의 구애를 받고 동거하게 되고 아들까지 낳았다. 하지만 그녀에게 사랑은 어쨌건 이강국 뿐이었다.
이강국이 재차 남한에 내려와 활동하다가 체포령이 떨어졌을 때 미군 전용차에 숨겨 검문을 피한 후 월북시킨 것을 필두로, 이강국의 연락원을 여러 차례 자신의 집에 숨겨 주었고, 사형수였던 남로당 빨치산책 이중업을 빼내 북으로 보내기도 했으며 집에는 무기를 숨겨 두기도 했다(고 한다.) 간첩 행위를 한 것은 사실로 보이지만 그녀는 아무런 이념도, 정치적 동기도 없었다. 그녀를 그렇게 만든 것은 오로지 사랑이었다. 그의 후배였던 수필가 전숙희의 말은 안타까움이 세월을 넘어 뚝뚝 떨어진다. “수임이 언니는 사랑밖에 몰랐어요 너무너무 순진했지요. 자기가 한 일이 뭔지도 몰랐어요. 사람 목숨 하나 구해 준 게 무슨 죽을 죄냐고, 끝까지 그렇게 생각했으니까요.”
‘순진무구하고 사랑밖에 몰랐던 맹꽁이’의 꼬리는 쉽사리 수사 당국에 밟혔다. 하지만 미군 헌병대장의 집이란 언감생심 남한의 수사 기관이 쉽사리 치고 들어갈 곳이 아니었다. 이승만 대통령까지 나서서 역정을 낸 뒤에야 체포 작전이 실행되지만 그래도 미군 헌병대장 집에서 그 아이까지 낳은 여자를 끌고 나올 배짱은 돋아나지 않았다. 이때 등장하는 것이 또 한 번 모윤숙이다.
3월 5일은 모윤숙의 생일이었다. 모윤숙은 “미역국이라도 혼자 먹으려니 네 생각이 나는구나. 와서 같이 미역국이라도 먹자.”고 김수임을 불렀고 그 집 앞에는 수사진이 대기하고 있었다. 아무 것도 모른 채 미역국을 떠올리며 모윤숙의 집 앞에 이른 김수임은 삽시간에 눈이 가려지고 재갈 물려져 체포된다. 이후 재판과정에서 모윤숙은 “종달새라는 별명이 붙을만큼 명랑하고 성경도 열심히 읽는 수임이가 공산주의에 물든 것은 아니며, 첫사랑 때문에 피동적으로 저지른 것으로 관대한 처분을 바란다,”고 변호했는데 그 뒤 그녀가 쓴 일기를 보면 그 우정(?)이 좀 의심스러워지기도 한다. “수임은 사형이 분명했다. 나는 그 사형이 그릇된 것이란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내 친구 수임은 죽었다 벌써 죽었다. 이 지상에는 없는 수임이다. 저것은 사형을 받기 위해 만들어진 모조품이다.”
1950년 6월 15일 사형선고를 받은 (16일이라는 기록도 있다) 김수임은 전쟁이 터진 후 서울 함락 직전 한강 백사장에서 총살된다. 김수임의 체포 사실이 알려지자 남북 교환 인사 명단에 김수임을 넣어 김수임을 구출해 보려고 애썼던 이강국 역시 5년 뒤 이번엔 “미제의 간첩” 혐의로 북한에서 사형당한다. 똑똑하고 반듯했던, 그러나 이념의 구현자가 되기를 꿈꾸었던 한 남자와 명랑하고 사랑에 약했던 여자는 그렇게 역사의 격랑에 휘말려 갔다.
그런데 지난 2001년 AP 통신은 비밀 해제된 문서 가운데 이강국이 CIA의 협조자로 기록된 문서를 세상에 공개한다. 실제로 이강국이 ‘미제의 간첩’일 수도 있었던 것이다. 또한 김수임의 애인이었던 베어드 역시 그녀의 정체를 알고 있었고, 김수임을 통해 일종의 역공작을 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김수임의 아들이 양로원에 있는 베어드를 찾아갔을 때 베어드는 “I'm your father"가 아니라 ”네 아버지는 미스터 스미스“라는 기이한 말을 남긴다. 이쯤 되면 뭐가 뭔지 모르는 뒤죽박죽이 된다.
종달새처럼 재잘대기 좋아했던, 사랑에 목숨을 걸었을 뿐 이념 따위는 몰랐던 것으로 그녀를 아는 모두가 증언하는 한 여자가 1950년 6월 15일 죽음의 선고를 받는다.
사진은 세브란스병원근무시절의김수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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