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1943년 4월 18일 야마모토 이소로쿠 격추
1943년 4월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었다. 그 전 해의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이 패한 이후로 알루샨 열도에서 과달카날까지 전 태평양을 호령하던 일본의 기세는 완연히 꺾여 가고 있었다. 그 가장 큰 요인 중의 하나는 일본의 암호를 미국측이 고스란히 해독하고 있었다는 데에 있었다. 일본은 이 사실을 꿈에도 몰랐는데 미국측의 철저한 연막 작전도 한몫을 했다. 이를...테면 암호 해독을 통해 목표물이 설정되면 반드시 공습에 앞서서 정찰기를 근처에 출동시켰다. 즉 일본군으로 하여금 “우리 암호가 노출됐다!”는 의심을 하지 않고 “재수없게 정찰기에 걸렸다!”라고 여기게 만든 것이다.
그러던 중 1943년 4월 17일 일본군의 암호를 해독하던 요원이 심각한 얼굴로 상관을 찾았다. 해독된 내용은 입이 벌어질만한 일이었다. 진주만 공격의 총지휘관이었고 일본 해군의 상징과도 같은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이 비행기를 타고 남태평양 각처의 일본군을 순시하고 있었는데, 4월 18일의 일정이 출발지와 도착지는 물론 분 단위의 비행계획, 동행자, 호위 전투기 병력까지도 상세하게 기록된 전문이었던 것이다. 이건 대통령 보고 사항이었다. 루즈벨트는 해군 장관에게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이 탄 비행기를 격추시키라고 명령했고, 미 해군은 그 명령을 이행한다. 야마모토의 비행기는 비행 도중 ‘우연히’ 발각되어 격추당한 뒤 밀림으로 떨어진다. 그리고 일본군 제독 야마모토 이소로꾸는 죽었다.
러일전쟁 당시 쓰시마 해전에 참가했다가 손가락 몇 개를 잃은 손으로도 물구나무서기를 곧잘해서 친구들을 즐겁게 했던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파시즘의 광기로 치닫던 일본에서 보기 드문 합리적인 장교였다. 진주만 공격을 퍼부은 뒤 환호하는 부하들 틈에서 “우리는 잠자는 사자를 깨운 건 아닌가”라고 중얼거렸다는 얘기는 유명하지만 그 외에도 그가 미국과의 전쟁을 얼마나 미친 짓으로 보고 있었는지를 알려주는 예화는 많다. 진주만을 치러 나간 지휘함 안에서도 그는 이미 공격 준비에 나선 부하들에게 미국과의 극적인 합의가 도출되면 공격을 중지하고 돌아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부하 나구모 제독 이하 공명심 그득한 장교들이 “한 번 누던 오줌발을 어떻게 멈추느냐.”라고 반발하자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이렇게 소리친다. “이 명령을 받고 돌아올 수 없다고 생각하는 자가 있다면 내게 사표를 보내라. 페리 제독의 흑선이 일본에 온 이래 일본 해군이 함대를 건설한 건 오로지 평화를 위해서였다.”
또 전쟁 발발 전 일본이 ‘귀축미영’ (미국과 영국을 낮춰 부르는 호칭)과의 전쟁 불사를 호언하던 무렵, 야마모토는 “정말로 미국과 전쟁을 하겠다는 미치광이들이 있기는 있구나.” 라고 탄식하고 있었고 “전쟁이 일어나면 동경은 세 번쯤 불바다가 될 것이다.”고 푸념하고 있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미국 영국 5 일본 3의 비율로 함대 규모를 제한한 워싱턴 해군 군축 회의 후 왜 우리가 3이냐고 방방 뜨는 젊은 일본 해군 장교들에게 “야. 우리가 3으로 묶인 게 아니라 영국 미국이 5로 묶인 거야. 만약 정말 군비경쟁이 벌어진다면 우린 10대 1로 벌어질 수 밖에 없다니까?”라고 현실을 일깨워주던 지휘관이었다. “나에게 3천만개의 죽창을 다오. 세계를 정복해 보이겠다.”는 식의 말도 안되는 자신감이 난무하고 까짓거 전쟁 한 번 하자는 군부강경파가 민간 정부의 수상을 파리 잡듯 죽여 버리던 시절, 야마모토 이소로쿠 역시 심각한 생명의 위협을 받는다. 일본 육군은 그를 죽이겠다고 별렀고 해군 장관은 결국 연합함대의 사령관으로 그를 피신(?)시켜야 했던 것이다.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인생 행로를 지켜보자면 논쟁과 대립 속에서는 언제나 득세할 수 밖에 없는 강경론자들 앞에서 한 온건파가 직면해야 했던 비극의 모든 것이 보인다. 겁쟁이로 몰리기도 하고 배신자로 낙인찍히기도 하고 심지어 자기편이 자신을 죽이겠다고 나내는 꼴을 목도하기도 하고, 승패가 뻔한 전쟁을 어떻게 피하려고도 하지만 그에 본질적인 저항을 하지는 못하고 결국 “개전 1년 동안은 무슨 수를 쓰든 버틸 거니까 그 다음은 알아서 하시오.”라는 식으로 자신이 바보라고 생각했던 부류에 동참하고, 그 지략을 다해 바보들의 행진의 선봉이 되는 온건파.
말도 안되는 논리와 억지를 부리는 이들을 경멸했지만, 희생이 클 수 밖에 없는 폭격기의 근접 공격 방식을 변경하자는 부하의 주장을 “기백이 부족하다”고 거절하는, 그리고 총사령관의 몸으로 졸병들 사기를 높이겠다고 최전방을 누비다가 그만 죽음을 맞았던, 꼴통 일본군의 일원일 수 밖에 없던 온건파.
야마모토는 전쟁의 끝을 잘 알고 있었으면서도 전쟁의 소용돌이를 제거하려는 노력보다는 소용돌이에 스스로 휘말려 들어가는 선택을 했고 그 어쩔 수 없는(?) 선택 속에 일본은 300만이 넘는 목숨을 잃어야 했다. 다시금 온건파라는 개념을 생각해 본다. 역사 속에서 용기를 와치는 것은 항상 강경파였지만 진실로 유용했고 또 절실했던 것은 오히려 온건파의 용기가 아니었을까. 야마모토는 자신의 혜안을 미련한 용기와 맞바꾸는 쪽으로 선택을 했고, 이는 그와 일본 모두의 비극으로의 달음박질의 디딤대가 된다. 문득 고민이 된다. 과연 그런 일은 야마모토에게만 일어났을 것인가.
1943년 4월 18일 야마모토 이소로쿠 격추
1943년 4월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었다. 그 전 해의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이 패한 이후로 알루샨 열도에서 과달카날까지 전 태평양을 호령하던 일본의 기세는 완연히 꺾여 가고 있었다. 그 가장 큰 요인 중의 하나는 일본의 암호를 미국측이 고스란히 해독하고 있었다는 데에 있었다. 일본은 이 사실을 꿈에도 몰랐는데 미국측의 철저한 연막 작전도 한몫을 했다. 이를...테면 암호 해독을 통해 목표물이 설정되면 반드시 공습에 앞서서 정찰기를 근처에 출동시켰다. 즉 일본군으로 하여금 “우리 암호가 노출됐다!”는 의심을 하지 않고 “재수없게 정찰기에 걸렸다!”라고 여기게 만든 것이다.
그러던 중 1943년 4월 17일 일본군의 암호를 해독하던 요원이 심각한 얼굴로 상관을 찾았다. 해독된 내용은 입이 벌어질만한 일이었다. 진주만 공격의 총지휘관이었고 일본 해군의 상징과도 같은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이 비행기를 타고 남태평양 각처의 일본군을 순시하고 있었는데, 4월 18일의 일정이 출발지와 도착지는 물론 분 단위의 비행계획, 동행자, 호위 전투기 병력까지도 상세하게 기록된 전문이었던 것이다. 이건 대통령 보고 사항이었다. 루즈벨트는 해군 장관에게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이 탄 비행기를 격추시키라고 명령했고, 미 해군은 그 명령을 이행한다. 야마모토의 비행기는 비행 도중 ‘우연히’ 발각되어 격추당한 뒤 밀림으로 떨어진다. 그리고 일본군 제독 야마모토 이소로꾸는 죽었다.
러일전쟁 당시 쓰시마 해전에 참가했다가 손가락 몇 개를 잃은 손으로도 물구나무서기를 곧잘해서 친구들을 즐겁게 했던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파시즘의 광기로 치닫던 일본에서 보기 드문 합리적인 장교였다. 진주만 공격을 퍼부은 뒤 환호하는 부하들 틈에서 “우리는 잠자는 사자를 깨운 건 아닌가”라고 중얼거렸다는 얘기는 유명하지만 그 외에도 그가 미국과의 전쟁을 얼마나 미친 짓으로 보고 있었는지를 알려주는 예화는 많다. 진주만을 치러 나간 지휘함 안에서도 그는 이미 공격 준비에 나선 부하들에게 미국과의 극적인 합의가 도출되면 공격을 중지하고 돌아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부하 나구모 제독 이하 공명심 그득한 장교들이 “한 번 누던 오줌발을 어떻게 멈추느냐.”라고 반발하자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이렇게 소리친다. “이 명령을 받고 돌아올 수 없다고 생각하는 자가 있다면 내게 사표를 보내라. 페리 제독의 흑선이 일본에 온 이래 일본 해군이 함대를 건설한 건 오로지 평화를 위해서였다.”
또 전쟁 발발 전 일본이 ‘귀축미영’ (미국과 영국을 낮춰 부르는 호칭)과의 전쟁 불사를 호언하던 무렵, 야마모토는 “정말로 미국과 전쟁을 하겠다는 미치광이들이 있기는 있구나.” 라고 탄식하고 있었고 “전쟁이 일어나면 동경은 세 번쯤 불바다가 될 것이다.”고 푸념하고 있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미국 영국 5 일본 3의 비율로 함대 규모를 제한한 워싱턴 해군 군축 회의 후 왜 우리가 3이냐고 방방 뜨는 젊은 일본 해군 장교들에게 “야. 우리가 3으로 묶인 게 아니라 영국 미국이 5로 묶인 거야. 만약 정말 군비경쟁이 벌어진다면 우린 10대 1로 벌어질 수 밖에 없다니까?”라고 현실을 일깨워주던 지휘관이었다. “나에게 3천만개의 죽창을 다오. 세계를 정복해 보이겠다.”는 식의 말도 안되는 자신감이 난무하고 까짓거 전쟁 한 번 하자는 군부강경파가 민간 정부의 수상을 파리 잡듯 죽여 버리던 시절, 야마모토 이소로쿠 역시 심각한 생명의 위협을 받는다. 일본 육군은 그를 죽이겠다고 별렀고 해군 장관은 결국 연합함대의 사령관으로 그를 피신(?)시켜야 했던 것이다.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인생 행로를 지켜보자면 논쟁과 대립 속에서는 언제나 득세할 수 밖에 없는 강경론자들 앞에서 한 온건파가 직면해야 했던 비극의 모든 것이 보인다. 겁쟁이로 몰리기도 하고 배신자로 낙인찍히기도 하고 심지어 자기편이 자신을 죽이겠다고 나내는 꼴을 목도하기도 하고, 승패가 뻔한 전쟁을 어떻게 피하려고도 하지만 그에 본질적인 저항을 하지는 못하고 결국 “개전 1년 동안은 무슨 수를 쓰든 버틸 거니까 그 다음은 알아서 하시오.”라는 식으로 자신이 바보라고 생각했던 부류에 동참하고, 그 지략을 다해 바보들의 행진의 선봉이 되는 온건파.
말도 안되는 논리와 억지를 부리는 이들을 경멸했지만, 희생이 클 수 밖에 없는 폭격기의 근접 공격 방식을 변경하자는 부하의 주장을 “기백이 부족하다”고 거절하는, 그리고 총사령관의 몸으로 졸병들 사기를 높이겠다고 최전방을 누비다가 그만 죽음을 맞았던, 꼴통 일본군의 일원일 수 밖에 없던 온건파.
야마모토는 전쟁의 끝을 잘 알고 있었으면서도 전쟁의 소용돌이를 제거하려는 노력보다는 소용돌이에 스스로 휘말려 들어가는 선택을 했고 그 어쩔 수 없는(?) 선택 속에 일본은 300만이 넘는 목숨을 잃어야 했다. 다시금 온건파라는 개념을 생각해 본다. 역사 속에서 용기를 와치는 것은 항상 강경파였지만 진실로 유용했고 또 절실했던 것은 오히려 온건파의 용기가 아니었을까. 야마모토는 자신의 혜안을 미련한 용기와 맞바꾸는 쪽으로 선택을 했고, 이는 그와 일본 모두의 비극으로의 달음박질의 디딤대가 된다. 문득 고민이 된다. 과연 그런 일은 야마모토에게만 일어났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