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1981년 3월 25일 수수께끼의 인물 이갑성의 죽음
광복회라는 단체가 있다. 항일운동가와 그 유족들로 구성되었으며 그 희생정신을 오늘에 되살려 민족정기를 세우고 등등등 그 창립 의도와 목표가 매우 기특해 보이는 단체로서 8.15나 3.1절 기념식에서는 그 회장님이 빠짐없이 연단의 상석으로 모셔져 왔다. 그 초대 회장님은 이갑성. 그 이름도 혁혁한 기미년의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분이다. 사실상 민족대표라 불리우기에는 좀 민망한 30대 초반의 나이로서 세브란스 병원의 사무원이었으나 젊었으니만큼 학생들과의 긴밀한 관계를 통해 기미년의 만세를 조직했으니 그 공을 인정할 만하다. 또 그로부터 10여년 뒤 신간회 일로 한 번 더 옥고를 치렀고 이후로도 감옥을 들락거렸으니 독립운동가라고 불리울 자격은 충분할 것이다. 아울러 33인 중 가장 늦게까지 생존한 사람으로서 3.1운동의 살아있는 증거였으니 광복회 초대 회장 자리를 그 말고 누가 감당하랴.
하지만 광복회 초대 회장 이갑성에게는 또 하나의 이름이 있었다. 이와모도 쇼이치. 33인 중 세 명이 창씨개명에 동참했는데 그 셋 중의 하나였다. 배급 타 먹기 위해 억지로 창씨개명한 이도 부지기수이니 창씨개명 자체를 가지고 뭐라 할 수 없을 것이다. 문제는 그의 30년대 이후의 행적이다. 이 시기 그는 이갑성이 아니라 이와모도로, 그리고 조선독립운동가가 아니라 일제의 밀정으로 살았다는 수많은 증언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의 이력에 따르면 그는 1930년 경성공업주식회사의 지배인이 되었고 이후 1931년 상해로 ‘망명’하는데 그가 1937년 ‘일제에 잡혀’ 귀국하기까지의 기간이 문제의 핵심이 된다. 상해에서 그는 임시정부 출입도 하지 못하고 주변만 뱅뱅 돌았다. ‘밀정’으로 찍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상해 조선인 거류민 회장을 맡고 있던 이갑영같은 사람과 어울렸는데 그는 일본 영사관의 충실한 조력자였다. 이 기간 이갑성이 사용했다는 ‘일만산업공사 전무취체역 이와모도 쇼이치’의 명함이 후일 발견되기도 하는데, 이 직함은 일본인들도 감히 근접이 어려운 자리였다는 전설이다.
이갑성이 밀정이었다는 증언은 꽤 많다. 당장 우익의 거두 장택상도 박정희 정권 당시 한일회담이 무르익을 즈음, 장택상은 한 인사가 한일회담의 ‘고문’으로 발탁되는 것에 극력 반대한다. “그 사람 때문에 피해 다니고 옥고를 치른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그 사람을 하필이면 한일회담 고문으로, 일본 동경 한복판에 보낸다고? 그것만은 안된다.” 그는 신문을 움직였고 마침내 이 인사의 고문 추대는 무산됐다. 이 사람이 이갑성이었다. 장택상은 광복회원들과의 면담에서는 더욱 직정적으로 말한 바 있다고 한다. “이갑성이는 다른 건 몰라도 세 가지는 안돼. 정부통령하고 국회의장. 그 사람을 주구로 부리던 사람이 (일본에) 있는데 말이 되는가. 그래서 인촌 김성수를 부통령으로 밀게 된 것이다.” 장택상 뿐 아니라 청산리 전투의 지휘관이자 초대 국무총리 이범석까지도 이에 맞장구를 쳤다고 한다. 일설에 따르면 인촌 김성수도 유언에서 이갑성의 행적을 밝히며 자신도 그 피해자였음을 밝혔다고도 한다.
증언은 허다하게 많지만 그렇다고 이갑성이 밀정이었다는 문헌적, 실질적 증거가 딱 부러지게 등장한 것은 아니었다. 이갑성 역시 유사한 질문들을 받곤 했지만 명확한 해명 없이 넘어갔다. 1980년 5.16 쿠데타 참여자이기도 했던 박창암이 그가 경영하던 잡지 <자유>에서 이갑성 밀정설을 제기했고 이에 이갑성이 소송을 걸어 대응했으나 1981년 3월 25일 사망함으로써 진실은 역사의 어둠 속에 파묻히고 말았다.
장택상이 말한 바 “정부통령과 국회의장만은 못할” 이갑성은 실제로 그 외에는 국회의원부터 국무총리까지 거의 모든 자리를 향유해 보았다. 한때 이승만의 선봉으로 발췌개헌안을 통과시키는 주역이었고, 부통령 후보로까지 떠오르는 등 이승만의 후계자로까지 주목받았으나 이기붕에 밀려 좌초한 뒤에는 이승만에게 독재라는 비난을 퍼붓기도 했다. 4.19와 5.16 후 그는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다리 밑의 거지가 대통령이 되면 됐지 박정희는 대통령이 될 수 없다.”는 광복군 장교 장준하에게 아픈 데를 콕콕 찔리던 만군 장교 출신 박정희 대통령에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이자 공화당 창당 발기인으로 참여한 이갑성은 훌륭한 방패막이였다. 1965년 광복회가 설립되었을 때 그는 초대 광복회장이 된다. 그의 광복회가 한 일 중의 하나는 독립운동가 공적 심사를 통해 ‘나중에는 일본에 협력했지만 처음에는 항일투사였던’ 이들을 독립운동가로 인정한 것이었다.
2002년 광복회는 ‘민족정기를 세우는 의원모임’과 함께 친일파 명단을 발표하기로 했다가 그 가운데 16명의 명단을 인정할 수 없다는 이유로 기자회견을 거부했다. 그 면면을 보면 일찍이 이갑성이 초대 회장을 역임한 단체로서의 광복회의 속내를 엿볼 수 있을 것도 같다. 김활란, 모윤숙, 현제명, 김은호, 방응모, 김성수, 장덕수 등등. 대개는 이갑성과 같이 항일행적이 있으나 그 뒤가 아리삼삼한 이들이었거나 해방 이후에도 굳건히 이 나라의 주류로 뿌리 내려 그에 대한 시비가 불경스러운 사람들의 조합이었던 것이다.
1981년 3월 25일 성대한 국민장으로 장례가 거행된 뒤 그의 유해는 국립묘지에 묻혔다. 광복회의 회장과 민족대표 33인 중의 하나인 이갑성과 밀정설이 제기되고 그 진지한 증언까지도 잇따랐던 인물 이와모도 쇼이치. 우리는 아직도 초대 광복회장 이갑성의 진실을 모른다. 그리고 아마도 영원히 모를 가능성이 크다.
1981년 3월 25일 수수께끼의 인물 이갑성의 죽음
광복회라는 단체가 있다. 항일운동가와 그 유족들로 구성되었으며 그 희생정신을 오늘에 되살려 민족정기를 세우고 등등등 그 창립 의도와 목표가 매우 기특해 보이는 단체로서 8.15나 3.1절 기념식에서는 그 회장님이 빠짐없이 연단의 상석으로 모셔져 왔다. 그 초대 회장님은 이갑성. 그 이름도 혁혁한 기미년의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분이다. 사실상 민족대표라 불리우기에는 좀 민망한 30대 초반의 나이로서 세브란스 병원의 사무원이었으나 젊었으니만큼 학생들과의 긴밀한 관계를 통해 기미년의 만세를 조직했으니 그 공을 인정할 만하다. 또 그로부터 10여년 뒤 신간회 일로 한 번 더 옥고를 치렀고 이후로도 감옥을 들락거렸으니 독립운동가라고 불리울 자격은 충분할 것이다. 아울러 33인 중 가장 늦게까지 생존한 사람으로서 3.1운동의 살아있는 증거였으니 광복회 초대 회장 자리를 그 말고 누가 감당하랴.
하지만 광복회 초대 회장 이갑성에게는 또 하나의 이름이 있었다. 이와모도 쇼이치. 33인 중 세 명이 창씨개명에 동참했는데 그 셋 중의 하나였다. 배급 타 먹기 위해 억지로 창씨개명한 이도 부지기수이니 창씨개명 자체를 가지고 뭐라 할 수 없을 것이다. 문제는 그의 30년대 이후의 행적이다. 이 시기 그는 이갑성이 아니라 이와모도로, 그리고 조선독립운동가가 아니라 일제의 밀정으로 살았다는 수많은 증언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의 이력에 따르면 그는 1930년 경성공업주식회사의 지배인이 되었고 이후 1931년 상해로 ‘망명’하는데 그가 1937년 ‘일제에 잡혀’ 귀국하기까지의 기간이 문제의 핵심이 된다. 상해에서 그는 임시정부 출입도 하지 못하고 주변만 뱅뱅 돌았다. ‘밀정’으로 찍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상해 조선인 거류민 회장을 맡고 있던 이갑영같은 사람과 어울렸는데 그는 일본 영사관의 충실한 조력자였다. 이 기간 이갑성이 사용했다는 ‘일만산업공사 전무취체역 이와모도 쇼이치’의 명함이 후일 발견되기도 하는데, 이 직함은 일본인들도 감히 근접이 어려운 자리였다는 전설이다.
이갑성이 밀정이었다는 증언은 꽤 많다. 당장 우익의 거두 장택상도 박정희 정권 당시 한일회담이 무르익을 즈음, 장택상은 한 인사가 한일회담의 ‘고문’으로 발탁되는 것에 극력 반대한다. “그 사람 때문에 피해 다니고 옥고를 치른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그 사람을 하필이면 한일회담 고문으로, 일본 동경 한복판에 보낸다고? 그것만은 안된다.” 그는 신문을 움직였고 마침내 이 인사의 고문 추대는 무산됐다. 이 사람이 이갑성이었다. 장택상은 광복회원들과의 면담에서는 더욱 직정적으로 말한 바 있다고 한다. “이갑성이는 다른 건 몰라도 세 가지는 안돼. 정부통령하고 국회의장. 그 사람을 주구로 부리던 사람이 (일본에) 있는데 말이 되는가. 그래서 인촌 김성수를 부통령으로 밀게 된 것이다.” 장택상 뿐 아니라 청산리 전투의 지휘관이자 초대 국무총리 이범석까지도 이에 맞장구를 쳤다고 한다. 일설에 따르면 인촌 김성수도 유언에서 이갑성의 행적을 밝히며 자신도 그 피해자였음을 밝혔다고도 한다.
증언은 허다하게 많지만 그렇다고 이갑성이 밀정이었다는 문헌적, 실질적 증거가 딱 부러지게 등장한 것은 아니었다. 이갑성 역시 유사한 질문들을 받곤 했지만 명확한 해명 없이 넘어갔다. 1980년 5.16 쿠데타 참여자이기도 했던 박창암이 그가 경영하던 잡지 <자유>에서 이갑성 밀정설을 제기했고 이에 이갑성이 소송을 걸어 대응했으나 1981년 3월 25일 사망함으로써 진실은 역사의 어둠 속에 파묻히고 말았다.
장택상이 말한 바 “정부통령과 국회의장만은 못할” 이갑성은 실제로 그 외에는 국회의원부터 국무총리까지 거의 모든 자리를 향유해 보았다. 한때 이승만의 선봉으로 발췌개헌안을 통과시키는 주역이었고, 부통령 후보로까지 떠오르는 등 이승만의 후계자로까지 주목받았으나 이기붕에 밀려 좌초한 뒤에는 이승만에게 독재라는 비난을 퍼붓기도 했다. 4.19와 5.16 후 그는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다리 밑의 거지가 대통령이 되면 됐지 박정희는 대통령이 될 수 없다.”는 광복군 장교 장준하에게 아픈 데를 콕콕 찔리던 만군 장교 출신 박정희 대통령에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이자 공화당 창당 발기인으로 참여한 이갑성은 훌륭한 방패막이였다. 1965년 광복회가 설립되었을 때 그는 초대 광복회장이 된다. 그의 광복회가 한 일 중의 하나는 독립운동가 공적 심사를 통해 ‘나중에는 일본에 협력했지만 처음에는 항일투사였던’ 이들을 독립운동가로 인정한 것이었다.
2002년 광복회는 ‘민족정기를 세우는 의원모임’과 함께 친일파 명단을 발표하기로 했다가 그 가운데 16명의 명단을 인정할 수 없다는 이유로 기자회견을 거부했다. 그 면면을 보면 일찍이 이갑성이 초대 회장을 역임한 단체로서의 광복회의 속내를 엿볼 수 있을 것도 같다. 김활란, 모윤숙, 현제명, 김은호, 방응모, 김성수, 장덕수 등등. 대개는 이갑성과 같이 항일행적이 있으나 그 뒤가 아리삼삼한 이들이었거나 해방 이후에도 굳건히 이 나라의 주류로 뿌리 내려 그에 대한 시비가 불경스러운 사람들의 조합이었던 것이다.
1981년 3월 25일 성대한 국민장으로 장례가 거행된 뒤 그의 유해는 국립묘지에 묻혔다. 광복회의 회장과 민족대표 33인 중의 하나인 이갑성과 밀정설이 제기되고 그 진지한 증언까지도 잇따랐던 인물 이와모도 쇼이치. 우리는 아직도 초대 광복회장 이갑성의 진실을 모른다. 그리고 아마도 영원히 모를 가능성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