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uantcast
Channel: 산하의 썸데이서울
Viewing all 497 articles
Browse latest View live

1967.8.31 아듀 증기기관차

$
0
0


tag :

새누리당 세속오계

$
0
0

새누리당 세속오계

  -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여군이충(女君以忠) : 여자 임금을 충성으로 섬기라.

 

: 여자 임금을 충성으로 섬겨 그 선대를 비판하지 말며, 여군이 내 동생이 그러하다 하니 그런 건 아니겠느냐 하면 지당하신 말씀이라 고개 숙일 줄 알며, 감히 댓거리하여 "나랑 싸우자는 것이오?" 이야기를 듣는 불충한 신하가 되지 말며, 그 수첩에 항상 이름을 올리는 신하가 되며, 임금께서 어디로 가자 하시면 상대방이 오라든 말든 그리로 모시고 가는 뚝심을 발휘해야 할 것이다.

사벌이효(事閥以孝) : 재벌을 효로써 섬기라.

 

: 재벌을 효도로써 아버지같이 섬기라. 너희는 그 장학생임을 두려워 말며, 후일 탈나기보다는 오늘의 배부름을 기억하라. 너희가 반항하거 항거한들 아버지 앞의 탕자에 불과하니 저희가 회개하고 머리 숙이면 언제든 너희 주머니를 채워 줄 것이니라. 간혹 돌아오지 않는 노회찬같은 탕자가 어찌 되었음을 너희가 보았으니 그리 불효하여 아버지의 노기를 불러들이지 말지니라.

 

선녀유택(選女有擇) : 여자를 고를 때 가려서 하라.

 

: 너희 지금 주군이 남긴 교지를 기억하느냐. "못생긴 여자가 서비스가 좋다."했던 그 인생의 통찰이 담긴 한 마디를 기억하느냐. 그리고 한동안 일세를 유쾌하게 했던 보온 안상수 공의 "자연산"을 기억하느냐. 모름지기 여자를 고를 때는 가림이 있어야 하느니 형수한테 들이대다가 곤욕을 치르고 있는 네 동료를 기억할지니라.

 

임전무퇴(臨錢無退) : 돈 앞에서 물러서지 마라

 

전쟁에서 물러나는 자는 용서받을 수 있으나 돈 앞에서 물러서는 자는 너희들 동류로서의 자격이 없음이니라. 돈 앞에서 무아지경 지고순백의 경지에 오르는 너희 지금 주군과 그 형과 그 멘토의 열정을 뼈에 새기고 행동하라. 돈 앞에서 물러서는 자는 너희 가운데 웃음꺼리가 되고 가문의 망신이 되리니 일찍이 김유신이 원술한테 한 행동을 너희가 너희 주군에게 당하게 되리라.

 

교우이협(交友以脅) : 친구는 협박으로 사귀라.

 

자칭 20년 친구라는 친구에게 전화해서 "다 알고 있으니 알아서 해라."는 식으로 얘기해놓고 그게 친구간의 우정을 믿고 한 거라는 정모 검사의 기백을 본받으라. 더 이상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tag :

1961.9.1 서울에 온 황태성

$
0
0
산하의 오역

1961년 9월 1일 서울에 온 황태성

1961년 8월말. 몇 명의 사내들이 휴전선을 넘었다. 늦장마가 기승을 부리고 있던 즈음 임진강을 헤엄쳐 건넌 사내들은 경기도 장흥과 의정부를 거쳐 서울 우이동 계곡까지 들어온 후 헤어졌다. 그들 중 한명은 공작원이라고 하기엔 너무 늙어 보였다. 머리 반은 백발에 튀어나온 광대뼈가 완연했던 그는 병으로 폐 한쪽을 들어냈던만큼 공작원으로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를 남파한 사람들도 그의 건강을 우려했지만 그가 맡은 임무는 그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황동지 꼭 과업 완수하시라요." 이북 사투리로 인사 건네는 공작원들에게 답하는 초로의 신사는 뜻밖에도 경상도 사투리를 쓰고 있었다. "욕 봤소. 몸조심들 하시오." 그의 이름은 황태성이었다. 그는 새로이 남한의 지배자로 떠오른 박정희라는 작달막한 별 두 개짜리 장군을 만나기 위해 남파됐다. 무역성 부상이라는 (어떤 설에 의하면 부상이 아니라 무역상이었다고도 하는데) 높은 전직 직함까지 갖고 있던 그가 공작원으로까지 차출된 데엔 이유가 있었다. "가가 상희 동생 정희라면 내가 잘 안다 아입니까. 내가 내리가서 담판을 짓겠습니더."


그는 일제 때부터 소문난 반골이었다. 1920년대에 서울로 올라와 6·10만세운동에 참여했고 경성고보 4학년때는 일본인 교장배척운동에 앞장서다가 퇴학을 당했다. 연희전문학교 2학년때도 항일운동에 관계하다가 역시 퇴학을 맞았다. 조선공산당 창당에도 참여했던 사회주의자 황태성은 수 차례 감방을 들락거렸고 고향에 내려와서도 김천 선산 지역에서 청년위 활동을 하며 일본 관헌들을 긴장시킨 사람이었다. 그런 그와 함께 청년 운동을 주도한 박상희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 관계가 얼마나 절친했는지 황태성이 중매를 서자 박상희는 부인될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보지도 않고 결혼을 응낙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 김종필 전 공화당 총재의 아내가 된다.

박상희에게는 똑똑해 보이는 동생이 하나 있었다. 나이가 열 살 차이여서 서먹했던 형보다는 형의 친구 황태성을 더 좋아라 따랐다는 소년의 이름은 박정희다. 그는 매사에 황태성의 말을 따랐고 중대한 결정을 해야 할 때면 황태성과 협의하곤 했다. 대구사범에 들어갈 때도 머리를 맞댔고 일본인 교장과 충돌한 후"큰칼 차고 싶어" 만주군관학교로 갈 때에도 그는 황태성의 의견을 구했다. 그런데 감옥을 수 차례 들락거린 일본 관헌의 요시찰 인물 황태성은 기이하게도 박정희의 결정을 격려해 주었다고 한다. "니가 하고 싶은 일을 해라. 뭘 배우든지 우리한테도 때가 올끼고 네가 배운 게 우리 민족에 도움이 될 끼다."

왜 그랬을까. 비록 황태성이 일제하에서 전향하여 어느 조합 간부로 연명하고 있을 때긴 했지만 박정희에게 천황폐하의 충량한 신하가 되라고 만주행을 권했을 것 같지는 않은데. 아무튼 해방 이후 황태성은 1946년 10월 1일의 농민 봉기의 중심에 섰고 좌익과 우익이 극단적으로 충돌하는 가운데 자신의 아들과 절친한 친구 박상희를 동시에 잃는다. 그 시절 남로당원으로서 그는 한 명의 국방경비대 장교의 입당에 신원보증을 서게 되는데 바로 자신이 귀여워했고 만주군 장교로 근무하면서 휴가 때만 되면 찾아왔다는 친구의 동생 박정희였다.

1961년 9월 1일 황태성은 고향 친구의 아들인 김민하의 집에 나타나 자신이 황태성임과 북한에서 온 밀사임을 밝힌다. 불구대천의 기세로 총칼을 겨냥하고 있던 적지의 수도 한복판에 나타난 밀사. 그는 남한의 새 실권자 박정희와 접촉하려고 애쓴다.


"가는 내가 잘 아는 아입니다. 나를 존경하던 사람입니다. 내 말은 통할 겁니다." 남파되기 전 황태성은 대남공작을 책임지던 이효립에게 간절하게 말했다. 또 남한의 김민하에게도 자신은 공산주의자라기보다 민족주의자이며 박정희 장군을 만나 남북의 평화와 통일에 관한 생각을 나눠 보겠다는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반공을 국시로 한다"는 혁명정부 지도자에게 무슨 말을 하느냐는 조카의 설득도 무위였다. 적어도 황태성에게 박정희는 사범학교를 갔다가 군인이 되고파 만주고 떠날때 찾아와서는 우짜면 좋겠십니꺼 진지하게 고민하던 영특한 청년 그 이상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적어도 그 앞에만 가면 과거의 믿음과 추억이 되살아날 수 있을 것이고 남과 북의 대립을 누그러뜨릴 계기가 자기와 박정희로 인해 마련되리라 확신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실은 녹녹지 못했다.

그는 옛 친구의 부인이자 쿠데타 군의 총수의 형수에게 연락을 넣었다가 그 정체가 알려지고 그는자신의 친구의 조카사위 김종필이 거느린 중앙정보부에 체포된다. 그는 박정희를 애타게 찾았으나 만나지 못했고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을 만났다고 생각했지만 그 또한 김종필을 가장한 수사관이었다. 언젠가는 민족을 위해 써먹을 수 있으니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격려했던 청년, 자신이 입당보증인이 되어 남로당에 입당시켰던 군인, "이념에 충실했던 것은 맞으나 이념보다는 권력이 더 충실했고 이념조차 자신의 권력욕 때문에 선택한 것으로 보이는" (CIA 직원의 평가) 박정희는 황태성을 끝내 만나지 않았다. 그는 사진으로만 황태성을 보며 "황선생님도 세월을 피해가지 못하시는구나."라고 중얼거렸다고 한다.

무모할만큼 순진했던 황태성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가장 결정적인 계기는 일종의 매카시즘이었다. 남로당 경력으로 인해 박정희는 사상이 의심스러운 자로 공격받았고 군정 종식.후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후보 윤보선은 박정희가 황태성이 가져온 20만달러로 공화당을 창당했다는 공격을 퍼부었던 것이다. 박정희는 이런 공격에 대해 "비열한 매카시즘"이라고 분노했다니 격세지감도 이런 격세지감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황태성의 죽음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재미 언론인 문명자는 정보부장 김형욱이 망설이던 박정희를 밀어부쳐 사형 재가를 받아냈다는 증언을 들었다고 했다. 미국도 박정희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고 있었고 한국 민간인들 중에도 저 빨갱이의 정체를 밝히겠노라 뒷조사를 하는 이들까지 생겨나고 공화당이 북한의 지원으로 창당됐다는 언설이 난무한 차에 황태성을 살려 두거나 북으로 귀환시킨다는 것은 스스로의 목젖에 대침을 찌르는 일이었던 것이다.

황태성은 결국 총살됐다. 그는 남으로 내려온 목적 가운데 어느것도 이루지 못한채 자신이 그렇게 믿었던 후배를 보지도 못하고 죽었다. 단 하나 그가 이룬 것이 있다면 대구 봉기 때 목숨을 잃은 아들의 딸. 즉 손녀를 문틈으로나마 지켜본 것이다. 말 한 마디 건네지 못한채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없이 자라난 손녀를 바라보는 그 심경은 어땠을까. 박정희를 만나 대화를 나누지 못한 것보다 더 처참하고 안타깝게 그 가슴을 쥐어짜지 않았을까.

불행한 한국인 또는 조선인 황태성은 그렇게 죽었다. 그의 유해가 고향에 돌아갔을 때 그 살벌한 분위기에서도 '황태성 선생'을 기억하여 몰려든 사람들이 많았다고 하니 그가 어떤 이였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겠다. 1961년 9월 1일 비운의 밀사 황태성이 서울에 나타났다.



tag :

1919.9.2 강우규와 김태석

$
0
0
산하의 오역

1919년 9월 2일 강우규와 김태석

조선 천지를 뒤흔들었던 3.1 항쟁이 가라앉고 조선에는 새 총독이 부임하여 온다. 사이토 마코토 해군 대장이었다. 해군 대장 제복을 입고 위풍당당하게 기차에서 내린 사이토 마코토는 즐비하게 늘어선 호위 속에 총독 전용 마차를 향했다. 일장기를 흔드는 환영 인파는 많았지만 분위기는 어딘지 모르게 뒤숭숭했다. ‘조선 독립 만세’의 굉음의 메아리가 아직 생생할 때였으니 그랬으리라. 하지만 그 따위 만세 어림도 없다는 듯 조선 총독의 늠름한 행보는 조선 사람들을 위압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사이토 총독이 마차에 오르기 직전, 남대문 역 전체를 뒤흔드는 폭음이 울려퍼졌다. 질서정연하던 역두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총독을 노리고 누군가 던진 폭탄이 터진 것이다. 일본 아사히 신문 특파원을 비롯하여 2명이 죽고 35명이 부상당했다. 총독은 간발의 차로 무사했다. 파편 하나가 허리에 차고 있던 대검에 맞은 정도가 그가 입은 피해의 전부였다. 그러나 일본 경찰의 눈은 뒤집혔다. 총독이 부임하는 날 폭탄 세례를 받았다! 그네들 천황에 대한 송구스러움은 말할 것도 없고 전 세계적으로 대대적인 망신을 당한 셈이었다.

개 발바닥 땀나도록 뛰어다니던 일본 경찰은 사건 보름 후 범인을 체포한다. 범인은 놀랍게도 예순 다섯의 노인 강우규였다. 평안도 덕천에서 태어났지만 함경도 홍원에서 이주해서 의업으로 재산을 모았고 만주로 가서는 그 돈을 학교 설립에 털어넣었던 독실한 기독교인이 그의 신상명세였다. 그는 폭탄을 가랑이 사이에 두르고 (이 은닉 수법은 먼 훗날 이봉창까지 사용한다) 남대문 역 귀빈실까지 잠임하여 거사를 결행한 것이다. 요즘이야 예순 다섯은 경로우대도 간당간당한 나이지만 그때는 잘하면 증손자도 볼 수 있는 아랫목 지킴이에 넉넉한 나이였다. 그런 노인이 폭탄을 던지다니 뒤통수를 맞아도 제대로 맞은 셈이었다.

그 얼얼한 뒤통수를 복수라도 하듯 일본 경찰은 강우규에게 그야말로 악형을 가한다. 모진 고문 끝에 그 혀가 세 치나 빠져나온 것을 보았다고 하거니와 강우규는 이미 사형 전에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그래도 강우규의 기는 꺾이지 않았다. 감옥에 앉아서도 성경 봉독을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는 이 독실한 기독교인이 만약 “권세 있는 자는 하나님의 기름 부은 자이니 너희는 그에 복종하라.”는 따위, 대한민국의 목사들이 지껄이는 설교를 들었다면 의자를 집어던졌을 것이다. 그가 실제로 두 번씩이나 법정에서 의자를 집어던졌듯이. “우국지사였지요. 정말 과장 안하고 우국지사였다고 생각합니다. 예순 몇 살의 노인이 탁상을 두드리며 독립의 열정을 피력합니다. 비장했습니다.” (시바 료. 당시 경기도 경찰부장)

그는 변호인 선임도 거부한 채 사형을 선고받는다. 아들에게 남긴 한 마디는 실로 마음이 뭉클하다. “내가 돌아다니면서 가르치는 것보다 나 죽는 것이 조선 청년의 가슴에 적으나마 무슨 이상한 느낌을 줄 것 같으면 그 느낌이 무엇보다도 귀중한 것이다. 조선 청년의 가슴에 인상만 박힌다면 그만이다. 쾌활하고 용감히 살려고 하는 조선 청년들이 보고 싶다! 아 보고 싶다!” (아들 중건에게 남긴 유언) 청년들에게 ‘무슨 이상한’ 느낌이라도 주기 위해 목숨을 내던진 한 노인. 사형대 앞에서도 유장하게 시를 읊던 이 교양인은 1920년 지금도 남아 있는 서대문 형무소 사형장에서 세상을 떠난다.

이 강우규를 체포한 사람은 역시 조선인이었다. 이름은 김태석. 역시 강우규처럼 평안도 출신이었다. 강우규처럼 학교 교사 노릇도 했던 그는 조선 총독부 경찰관 통역생으로 들어가면서 전혀 다른 인생을 걷게 된다. 그도 사이토 총독이 오던 날 남대문 역에 있었고 강우규가 폭탄을 던지는 것도 보았다. 또 그 파편으로 인해 정강이에 상처를 입었다. 독기를 품은 김태석은 수사에 나서 강우규를 체포하는데 큰 공을 세운다. 강우규의 혀를 세 치나 빠져나오게 했던 그 고문의 당사자가 바로 그였다.

또 의열단 최초의 거사인 밀양경찰서 폭파 사건 때 그는 관련자 15명을 아예 곤죽으로 만들어 놓았다. 김태석은 경찰을 나와 군수와 참여관, 중추원 참의 등 고위관직을 지내다가 해방을 맞는다. 그는 당연히 반민특위의 최고 관심 대상으로 체포되는데 그때 그는 밀양 경찰서 사건의 기억과 맞닥뜨린다. 홍종린이라는 사람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당시 학생이던 나의 동지 윤필환 이하 15명을 체포하여 고문과 극형을 가했고 나중에는 죽게까지 한 자가 바로 이자다!”

하지만 김태석은 철저하게 사실을 부인하려 들었다. 자기는 심부름꾼에 불과했고 ‘고쓰가히’ 즉, 소사에 지나지 않았고 심지어 3.1 운동 당시 자신도 만세를 불렀으며 독립운동자를 구해 낸 애국자로 떠들어 댔다. 강우규의 의연함과는 안드로메다만큼이나 먼 비굴함이었고 조선 사람들의 가슴에 “무슨 이상한” 느낌이 아니라 “이뭐병같은” 분노를 심어 주기에 충분한 뻔뻔함이었다. 사형이 구형되고 무기징역 선고를 받았지만 1950년 봄 그는 스리슬쩍 석방되어 유유자적 역사의 커튼 뒤로 사라진다. 그는 그 외 어떤 처벌도 받지 않았고 감방 똥통 냄새도 몇 달 맡지 않았다. 1919년 9월 2일 사이토 마코토가 서울에 발을 디디던 날 그를 죽이고자 했고 그를 지키고자 했던 평안도 출신 두 남자의 일생은 그렇게 극명하게 대비된다.



tag :

1995.9.3 어느 여배우의 일생

$
0
0
 
산하의 오역

1995년 9월 3일 어느 여배우의 일생

최진실, 고소영, 심은하는 90년대 여배우 트로이카였고 그들보다 반 반짝 앞서서는 김혜수 채시라 하희라의 하이틴 트로이카 시대가 있었다. 그 이전에는 유지인 정윤희 장미희의 3두마차가 있었고 더 거슬러 올라가서는 문희 윤정희 남정임의 삼각편대가 영화계를 장악했다. 이 트로이카 즉 삼두마차 운운의 수식어는 주로 여자 배우들에게 붙여지는데 이는 일제 강점기에 갓 피어나기 시작한 여배우들의 역사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1920년대 조선의 3대 여배우로 꼽혔던 이는 이월화, 복혜숙, 그리고 석금성이었다.

이월화는 1923년 <월하의 맹서>에서 그녀는 최초로 영화에 출연한 여배우이고 복혜숙과 석금성은 극단 토월회의 전성기를 구가한 여배우들이며, 해방 이후 20세기 후반을 관통하는 세월에 이르도록 스크린을 지켰던 이들이었다. 그 중 석금성의 본명은 석정희(石貞姬)였다고 한다. 아담한 맵시와 천진난만한 애교로써 장안의 인기를 한 몸에 모았다는 기생 석정희는 신극 운동단체인 토월회(土月會) 전무 이서구의 눈에 들어 토월회에 입단한 후 석금성(石金星)이란 이름을 얻으면서 배우가 되었다. 이 즈음 입단했던 복혜숙은 80원, 석금성은 60원의 월급을 받는데 이것이 이른바 ‘프로 여배우’의 시초였다 할 것이다. 1925년 어느 날 공연을 하는데 한 관중이 사과를 던진 것이 그녀의 배에 명중했다. 하필이면 그녀는 그때 임신 중이었던 바 그대로 졸도하고 말았다. 엉겁결에 그 대타로 올라왔다가 또 하나의 스타가 된 것이 ‘눈물의 여왕’ 전옥이다. 비극 연기의 최고봉으로 유명해진 전옥은 배우 최민수의 외할머니이기도 하다.

석금성이 스타덤에 올랐던 작품 중의 하나는 ‘아리랑 고개’였다. 대충 내용을 소개하면 가난한 연인들이 행복한 미래를 꿈꾸는데 일본인 악덕 고리대금업자가 끼어든다. 일본인 고리대금업자는 남자 주인공에게 돈을 갚으라고 핍박하고 결국 남자 주인공은 집을 떠나야 했다. 이때 피눈물나는 이별의 현장에서 이별가로 <아리랑>이 불리워지는데 여주인공 석금성이 이 노래를 부르면 울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이 연극이 성황리에 공연되던 도중의 어느 날, 석금성은 딸이 죽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듣는다. 하지만 그 망연자실한 상황에서 석금성은 무대에 올랐고, 그 슬픔은 연기로 승화되어 더욱 많은 사람들을 통곡시켰다고 한다.

한편 석금성은 1920년대 후반에는 무대를 떠나 평범한 삶을 영위하기도 한다. 매일신보 1930년 10월 3일자에는 ‘무대배우 석금성(웃음 속에 피는 눈물)’이란 기사가 실린다. 여기서 석금성은 이렇게 얘기한다.

“나는 본시 기생 출신으로 봄바람에 나부끼는 노류장화(路柳墻花)의 생활도 해보았고, 또 남의 여염집 주부 노릇도 하여 보다가 어떤 사정으로 인하여 지금으로부터 6년 전 봄에 다시 광무대(光武臺)에서 공연 중인 토월회에 가입한 것이 여배우로 행세하게 된 첫 발단이 된 것입니다. 첫 무대는 ‘추풍감별곡(秋風感別曲)’의 추향(秋香)이었고, 연극을 하는 사이사이에 ‘약혼(約婚)’과 같은 영화에도 출연해 본 경험이 있습니다마는, 나에게는 암만 해도 무대극이 적당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나의 성격으로 봐서 가장 적역(適役)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토월회에서 공연한 ‘스잔나’와 기타 천진스러운 것이나 그렇지 않으면 날뛰고 까부는 역인 것 같습니다.”    
 그 끼는 여전했던 모양이다. 자신의 연기와 캐릭터 분석을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시집 가서 조신하게 애 낳고 살 팔자는 아니었던 것이다.

후일 “......나는 물불을 가릴 수 없을 만큼 그저 맹목적이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나는 가정에서나 친구한테 미친 사람 취급을 받지 않을 수 없었는가 합니다.”라고 회고했던 그녀는 이미 연기에 홀려 있던 사람이었다.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무대에 서고, 지독한 열병에 시달리면서도 대사를 외웠던 그녀는 천상 배우였다.

1931년쯤이면 석금성은 다른 남자의 아내가 돼 있었다. 이 결혼은 꽤 성공적이었는데 그 남편은 다름아닌 세계적인 무용가 최승희의 오빠이며 경성방송국의 아나운서이자 PD였던 최승일이었다. 석금성은 최승일과의 사이에서 4남매를 낳으며 단란한 생활을 한다. 그러나 분단이 이들을 갈라 놓는다. 이북으로 올라간 최승희를 돕겠다고 38선을 넘은 남편이 돌아올 기미를 보이지 않자 석금성은 4남매 전부를 북으로 올려 보낸다. 그 가운데 후일 북한의 최고 여류 시인이 된 딸 최로사는 어머니가 “아이들의 장래”를 생각해 내린 결정이었다고 했지만 혹시 그녀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운 배우가 되어 보고 싶은 게 아니었을까.

그로부터 반 세기 동안 그녀는 외롭지만 열정적인 여배우로 스크린을 수놓는다. 스스로 본격적인 영화계 입문이라 회고한 <춘향전> 이후 그녀가 주로 맡은 역할은 표독한 시어머니나 완고한 노부인이었다.  특히 <장화홍련전>에서는 표독스런 계모 역으로 개성적인 연기파 배우로서의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60~70년대 한국영화에서 한복에 털조끼를 걸친 채 호령하고 군림하는 부인 역을 맡은 배우는 석금성이기 십상이다. 노역을 많이 하기로는 황정순도 만만치 않지만 둘의 차이는 명백하다. 석금성은 희생적인 모성애를 가진 자애롭고 따뜻한 어머니이기보다는 매서운 눈매로 질책하는 호된 시어머니, 앙칼지고 근엄한 사장 부인, 화통하고 강인한 어머니이다. 엄한 시어머니와 착한 며느리, 기센 부인과 무능한 남편, 강인한 어머니와 나약한 아들, 위세부리는 부잣집 마나님, 선악이 있는 것처럼 ‘부인, 어머니’상에도 양 극단이 있었고 그 한쪽 끝에는 항상 석금성이 있었다.” (여성 영화인 사전)

그녀는 토월회로 대변되는 연극과 그 이후 시작된 조선 영화, 그리고 한국 영화의 전성기라 할 60년대와 흑백 TV, 컬러 TV까지를 그 이력으로 꿰뚫었던 거의 유일한 배우였다. SBS 드라마 <분례기>(1991)에 출연할 때 그녀의 나이는 여든 다섯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가장 큰 적은 외로움이었다. 1991년 딸 로사와 고모의 뒤를 잇는 무용가가 된 아들의 소식을 전해 들었고 만남에 대한 기대에 설레기도 했지만 끝내 그들의 손을 잡을 기회는 오지 않았다. <분례기>에 출연할 때 알게 된 아역 배우의 아버지의 도움으로 그 집에서 4년을 지내는 동안 그녀는 하루에 3갑씩 담배를 태우는 것으로 쓸쓸함을 달래다가 저 세상으로 갔다. 1995년 9월 3일의 일이었다.

 


tag :

1999.9.4 개그콘서트 시작

$
0
0
산하의 오역

1999.9.4 개그콘서트 시작


어린 시절의 기억의 끄트머리까지 더듬어 볼 때 내가 제대로 기억하는 최초의 코미디는 '각국의 시계' (내가 붙인 이름임) 였다. 이기동과 배삼룡 등이 나와서 각 나라의 시계 소리를 들려 주는 것이었다. 한국인은 똑딱똑딱 소리를 내고 들어갔지만 중국인이 나와서는 "똑이다 해서 딱이다 해" 하고 시계가 간다고 했고, 일본인 분장을 하고 나온 땅딸이 이기동은 "똑이노 딱이노"...
일본 시계가 간다고 했다. 히트는 배삼룡이었다. 거지 분장을 하고 등장한 배삼룡은 북한인이었다. 그는 시계를 들고 이렇게 멘트하여 어린 나를 뒤집어지게 했다. "똑이니끼니 딱이야요."

아마도 그 프로그램은 <웃으면 복이와요>일 것이다. 나에게는 추억 속 코미디 프로그램의 대명사가 되어 있는 이 프로그램은 1969년에 시작해서 1985년에 막을 내렸다가 그 뒤 잠깐 부활하고 사라졌다가 또 비슷한 이름으로 반짝 나왔다가 없어지는 과정을 겪으면서 국내 최장수 코미디 프로그램으로 남아 있다. 그 뒤를 잇는 랭킹 2위의 프로그램이지만 아마도 내 아들과 딸에게는 나에게 <웃으면 복이 와요>와 같은 등급의 지존 코미디 프로그램으로 남을 프로그램이 1999년 9월 4일 그 서막을 열어젖혔다. 프로그램의 이름은 <개그 콘서트>다. 아마 아이들은 내가 그렇듯 평생 동안 <개콘>의 한 부분을 추억하며 웃음을 짓고 친구들 사이의 화제로 간직하고 과거를 되돌리는 타임머신의 엔진으로 갈무리해 둘 것이다.

유난히 성장이 빨랐던 아들은 돌잔치 때 뛰어나닐 정도였는데 또 유별나게 자주 넘어져 머리를 바닥에 박으면서 꿍꿍 소리를 내서 자지러지게 우는 바람에 제 엄마를 기겁을 시키기도 했다. 무슨 슬랩스틱 코미디를 하는 듯 헤헤거리고 걷다가 갑자기 뒤로 휘릭 넘어가서 바닥을 울리는데 제 엄마는 아주 칠색팔색을 했다. 요즘 말썽 부리는 것이 그때 넘어져 생긴 후유증이 아닐는지. 어느 날은 세상에 소파에 기어올라갔다가 다이빙해서 바닥으로 굴러 떨어지는 참극이 발생했다. 또 엄마 얼굴은 파랗게 되고 한바탕 부산을 떤 다음 다시 싱글거리는 녀석을 앞에 두고 TV를 틀었는데 책을 보고 있던 나에게 아내가 말을 건네 왔다. "김미화 참 대단해."

무슨 소리냐? 화면을 보니 당시로서도 꽤 중견급이라 할 수 있는 개그맨 김미화씨가 무대에서 도통 듣도보도 못할 개그맨들과 어울려 함께 춤을 추고 있었다. "꽤 나이가 든 선배일 텐데 저렇게 신인들하고 같이 어울리잖아. 대단한 것 같아." 그랬다. 쓰리랑 부부로 장안의 화제를 낳았을 때가 언제고, 그 뒤로도 방송인으로서 자신의 영역을 확고히 하고 있었던 그녀가 뭐하는지 모를 프로그램에서 신인들과 엉켜 춤을 추고 찧고 까불고 있네. 그 화면을 보고 아들 녀석은 또 엉덩이 실룩대며 춤(?)을 따라 하다가 또 뒤로 넘어갔다. 꽈당. 그게 개그 콘서트였다.

사실 개그 콘서트는 전유성 백재현 등과 함께 김미화가 만들다시피 한 프로그램이었다.

" 주저하는 KBS 본부장을 기획서 들고 쫓아다녔어요. 3개월간 신인들을 연습시킬 테니 기회를 달라, 파일럿을 떠보고 재미없으면 안 내보내면 되지 않냐고요. PD가 결정된 다음 전유성, 백재현 씨를 끌어들였죠. 그때 <이소라의 프로포즈>가 인기였는데 그걸 보면서 저런 공연은 방청객이 스스로 오는데 코미디는 왜 돈 주고 방청객을 불러야 할까 고민했거든요...... 신인들이 주인공이었죠. 거기서도 제가 중요하게 생각한 컨셉은 선배들이 후배들 공연을 뒤에 앉아 지켜본다는 거였어요. 김대희, 김영철 같은 2~3개월 된 친구들이 연기할 때 20~30년 선배들의 웃는 모습이 화면에 비치면 시청자가 ‘얼마나 웃기기에 베테랑들이 웃을까’ 하고 인지하게 되니까요. 실상 우리는 연습 장면을 수십 번 봐서 웃음도 안 나고 지키고 앉아 할 일도 없지만 반드시 그렇게 했어요.
......
성인 코미디를 하는 내 자신에 불만은 없었지만 후배들과 뭉쳐서 한다면 스스로 젊어지고 5년 할 걸 10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하지만 후배들을 위한 무대를 만들어주는 일은 어찌 보면 내 파이를 나눠주는 거라 선뜻 용기가 안 났어요. 좋은 선배로 남고 싶은 욕심도 강하지만 내가 만든다고 그 무대에서 내가 오래 갈 것도 아니고 두려웠죠. 하지만 전체적으로 코미디가 발전해야 결국 코미디언인 내 가치도 올라갈 거라고 판단했어요." (http://ch.yes24.com/Article/View/19851 최을영 인터뷰에서 인용)

아내가 간파한 대로 개그콘서트는 선배 코미디언 김미화가 후배들 속으로 뛰어들어가 그들과 함께 하고, 그들에게 자신의 무대를 나눠 주고 그들의 무대를 만들어 주려는 노력에서 큰 뿌리를 두었다. 그 뒤로 여러가지 우여곡절이 있었고 제작진과의 갈등 끝에 출연진들이 대거 타 방송사로 옮겨 가기도 하고, 시청률 침체로 위기를 맞기도 하는 등 부침이 있었지만 그 모든 것을 극복하고 개그콘서트는 무려 <웃으면 복이와요>를 바짝 위협하는 최장수 코미디 프로그램으로 잘 나가고 있다. 방청권을 얻으려면 제작본부장 빽도 안통한다는 인기를 구가하면서 말이다. (설마? 안믿어!)

그렇게 잘 나가는 데에는 많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우선 개그맨들의 피나는 머리 싸움이 있을 것이고 냉정하게 웃긴지 그렇지 않은지를 판단하는 제작진의 감과 판단력도 있을 것이며, 김미화가 모범을 보인 이래 쌓아져 온 선 후배들간의 애정과 팀웍도 한몫을 할 것이고, 김병만의 '달인'처럼 상상을 초월하는 인간 승리적 아이템까지도 몇 년을 이어가는 끈기도 그 비결이 될 수 있겠다. 그런데 나에게 그 이유 하나를 들라면 <개그 콘서트>가 단순한 슬랩스틱 코미디와 말장난을 넘어서서 사회에 대한 '촉'을 놓치지 않았다는 것을 들겠다. 누군가 누구를 때리고 나가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는 낄낄대고 웃을 정도겠지만 상놈이 양반을 골탕먹이고 뺨을 갈기는 설정의 탈춤이나 마당극에서 관중들은 그 배를 쓸어쥐고 깔깔대며 웃었을 것이다. 진정한 코미디는 코미디언 구봉서의 말대로 "코미디에는 페이소스가 (관객에게 연민과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요소) 있어야" 하는 것이다.

개콘이 유행시킨 유행어들을 돌이켜 보면 그것이 히트했던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을 부르짖을 때 국회의원 한선교는 흥분했다. 그는 kbs 김인규 사장에게 이렇게 물었다. "어떻게 김 사장이 취임한 뒤로도 이런 프로그램이 나올 수 있느냐." 비포(BEFORE) 김인규 시대라면 모르겠지만 당신은 그런 프로그램 좀 관리감독하라고 회전의자 내 준 거 아니냐는 힐난인 셈이며,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따위의 한탄보다는 "1등을 존중하는 아름다운 세상"으로 승화시켜야 할 거 아니냐는 지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당장 나만 해도 시청률이 나오지 않아 실컷 깨진 뒤에는 술잔을 기울이면서 개콘의 그 유행어를 따라 했었다. "어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이고 사람들이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상상 형제> 코너를 보면서 상상으로 무엇이든 다 할 수 있고, 가상적인 것으로 간접 경험하며 위안하는 형제의 모습을 보면서 웃다가도 서글퍼지는 경험은 나만의 것이 아니었을 것이며, <비상대책위원회>에서 야 안돼! 를 외친 뒤 말도 안되는 사설로 '대책'을 가로막는 '웃대가리들'의 모습에 웃다가도 혀를 찬 이들 역시 적지 않았으리라. <감수성>을 보면서 버럭 버럭 하다가도 상대가 뜻밖에 정색을 할 때 어어 왜 그래? 하면서 뒤통수를 긁었던 심약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을 것이고, "나는 뭐뭐 했을 뿐이고!!!"를 들으며 웃을 때는 실제와 허상의 사이에서 방황해야 했던 우리 모두의 자화상에 웃으면서도 뒤통수가 서늘했을 것이다. 그리고 동혁이 형이 "등록금이 우리 아빠 혈압이야? 왜 내려갈 줄을 몰라?"라고 부르짖었을 때 객석을 가득 메웠던 젊은 청춘들의 환호는 지금도 귀에 생생하다. 오죽하면 한때 형편이 좋지 않았던, 지금도 그리 나아진 것 같지는 않은 kbs 유일의 시사 프로그램(?)이라는 명예까지 얻었겠는가 말이다. 개콘은 그것이 달랐다. 그것이 다른 코미디 프로그램과의 차별성이었다. 그들은 웃음의 소재를 '세상에서부터 가져오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개콘 첫방송 무렵 꿍꿍 나자빠지던 아들은 지금 힘으로 하면 아버지를 찜쪄먹을 건장한 청소년이 돼 있고, 그때 세상에 없었던 딸도 개콘을 보며 소파 위에서 데굴데굴 구르며 웃는다. 이 아이들이 나이가 먹어도, 또 자식을 낳아도 개콘은 계속되길 바란다. 단순히 그 역사의 지속이 아니라 대한민국 코미디의 간을 더욱 키우고, 그 힘을 더욱 키우고, 더 많은 웃음 폭탄을 터뜨려 사람들의 속을 시원하게 하는 폭포가 되고 잠시나마 찌든 세속의 때를 벗기는 사우나가 되어 주기를 바란다. 그렇게 기원하면서 나는 오늘도 아들을 보며 부르짖는다. <멘붕학교>의 선생처럼. "요즘 애들 왜 이래? 아 왜 이래?" 그럼 우리 아들이 갸루상이 되어 이렇게 대답하겠지. "나는 아들이 아니무니다. 돈 먹는 하마이무니다. 용돈이 너무 작스무니다."




tag :

1924.9.5 최초로 한국인이 만든 영화는?

$
0
0
산하의 오역

1924년 9월 5일 최초로 한국이 만든 영화는?

한국 최초의 영화는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반사적으로 튀어나올 대답은 <아리랑>이 제일 많을 것이다. 물론 나운규의 <아리랑>이 한국 영화사에 금자탑으로 기록될 만한 영화이기는 하지만 '최초'의 타이틀을 차지하기엔 너무 늦게 나왔다. 최초의 한국 영화라면 대개 1919년 10월 27일 상영된 <의리적 구토>를 든다. 그래서 10월 27일이 영화의 날로 ...
기념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본격적인 극영화가 아니었다. 또 최초의 조선인이 만든 영화라 할 <월하의 맹서>는 조선 총독부 체신부 홍보 영화였다.

이미 1920년대에는 경성 시민들은 외국에서 수입된 영화의 맛을 보고 있었기에 본격 극영화에 대한 갈증이 있었다. 조선의 초보 영화팬들을 열광시킨 극영화가 등장한 것은 1923년의 일이다. 바로 우리의 고전 <춘향전>이 영화화된 것이다. 그런데 좀 아쉬운 것은 그 감독이 하야카와 고슈라는 일본인이었다는 점이다. 변사 김조성이 활약하고 조선극장에서 개봉된 이 영화는 무려 15만 명이라는 대단한 관중을 동원하며 빅히트했다.

이 요란한 흥행을 못마땅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는 이가 있었다. 박승필이라는 사람이었다. 일찌기 광무대라는 극장을 인수하여 전국의 명창들을 불러모으는 프로젝트를 성사시켰던 수완을 발휘한 바 있는 그는 전국 순회 공연을 나선 길에 한일합방 소식을 듣고 단원들과 함께 장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울었던 아픈 기억을 간직하고 있기도 했다. 이후 1917년 일본인으로부터 단성사를 인수한 그는 그곳에서 <의리적 구토>를 상영하여 굉장한 환호를 받기도 했지만 일본인 감독의 <춘향전>을 보면서 떨떠름한 기색을 감출 수 없었다.

왜 춘향전을 왜놈의 자식이 감독하고 난리야. 거기다 입장료는 다른 공연의 몇 배인 1원을 받아 처먹어도 조선 사람들이 줄을 서네? 에잇 퉤..... 이 배알도 없는 사람들아. 조선 총독부가 개최한 부업공진회 (박람회 같은) 에 때맞춰 만든 거란 말이다. 에잇..... .

하지만 박승필은 사업가일 뿐, 프로듀서나 촬영 감독이 아니었다. 여기서 당시 단성사 지배인 박정현이 등장한다. 그는 극영화를 만들 생각을 하고설랑 일본에 가서 촬영 기사로 일하다가 관동 대지진을 만나 조선으로 돌아와 있던 촬영 기사 이필우를 염두에 둔다. 이필우는 오케이를 했지만 박승필은 역시 사업가, 검증 안된 찰영 기사에게 투자할 생각이 없었고 그는 일단 이필우에게 동아일보 주최 정구 대회를 한 번 촬영해 와 보라고 한다. 이필우가 촬영해 온 필름을 보고서야 박승필은 고개를 끄덕인다. 드디어 조선인에 의한, 조선인을 위한, 조선인의 영화가 크랭크인된 것이다. 무슨 영화였을까? 바로 애들이 보기에는 무서운 동화지만 끈질기게 요즘 애들에게도 보여지는 <장화홍련전>이었다.

단성사 전속 성우 최병룡과 우정식이 장쇠 역과 사또 역을 맡았고 장화와 홍련 역에는 광무대에서 활동하던 김옥희와 김설자, 그 외 배역 역시 단성사 직원들이 각각 담당했다. 로케이션 장소는? 지금도 고대 앞에 있는 개운사 (당시는 영도사)였다. 그때만 해도 한적한 교외(?)였을 이 절에서 배우들은 한여름 땀 뻘뻘 흘리며 촬영을 했다. 최종 완성된 필름은 총 8권 분량으로 영사시간만 2시간가량이었다. 이 영화가 1924년 9월 5일 단성사에서 개봉된다. "평소 10전하던 관람료를 50전으로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밀려드는 관객으로 인해 이례적으로 평일 주야로 2회 상영에 9일간 장기 상영했다. 당시 활동사진관에서는 5일마다 필름을 교체했으며 일요일에만 주야 2회 상영일 뿐, 평일은 야간 1회 상영이 전부였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412932)

특히 여성관객들이 엄청나게 몰렸다고 하는데 이는 단성사 변사 김영환의 유장한 진행 덕분이었다고 한다. "아 이 한을 어찌 갚으랴 장화와 홍련이는 오뉴월에 서릿발이 내릴 듯이 이 악물고 죽어갔던 거디었다~~~~" (실제 내용과는 관련없음) 당시의 신문은 이렇게 장화홍련전을 치하한다. "비록 영화의 스케줄이 웅대하지는 못하였으나 사진 전편을 통해서 조금도 무리가 없었다."

박승필은 이후 나운규가 '나운규 프로덕션'을 차리고 영화를 만들어 낼 때 그 물주이기도 했지만 예나 지금이나 영화 사업이란 도박과 비슷해서 흥행의 부침에 따르는 희로애락을 골고루 겪다가 1932년 세상을 떠난다. 그가 죽었을 때 윤백남이 읽은 조사 가운데에 이런 내용이 있다., “싸움의 마당에서 후생을 위하여 피 흘리다 화살이 다 떨어져 명예의 전사를 하고 말았다." 즉 윤백남은 그의 죽음을 '전사'로 해석했다.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조선 땅에서 조선의 영화를 만들고자 애썼고, 조선 영화 발전에 힘쓰다가 결국 힘 다하여 쓰러진 것으로 그 죽음을 읽었던 것이다. 단성사는 최초의 단성사 장(葬)으로 18년간 자신의 주인이었던 고인을 보낸다.


1924년 9월 5일. 조선인에 의한 조선인을 위한 조선인의 영화가 태어난 날. 그로부터 88년을 하루 못 채운 2012년 9월 4일 베니스에서는 한국 감독의 영화가 그랑프리의 기대를 안고 공식 상영되고 있었다. 문득 생각하면 재미있지 않은가.



tag :

1956.9.6 천재의 최후

$
0
0
산하의 오역

1956년 9월 6일 천재의 최후

17년 전 생짜 조연출 시절에 중국 촬영을 가서 옛 고구려의 흔적을 구경한 적이 있다. 광개토왕비도 보았고 태왕릉 돌무더기에도 올라 봤고, 압록강 건너 북한의 만포를 굽어보며 감흥에 젖어도 봤는데 잊을 수 없는 기억은 고구려 고분 벽화를 생생하게 바라볼 기회를 가졌다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직접 들어가진 못했고 소수 정예만 잠입해서 찍어온 촬영본을 보는 정도였지만 그것만 해도...
대단한 감흥이었다. 근 천 오륙백년전의 그림이 이렇게 선명하게 남아 있다니. 그 색감이며 붓 터치감까지 만져질 듯이 살갑고 생생했었다. 미술에 소질이라고는 내시 수염만큼도 없는 처지임에도 그랬으니 그 재질이 비범한 사람들의 감흥은 나에게 댈 것이 못될 것이다. 하물며 이중섭 같은 천재 화가임에랴. ...

이중섭이 태어난 평안남도 평원군은 평양 근처에 있었고 고구려 시대 고분도 산재해 있었다. 조선 시대 내내 차별을 당했으면서도 민족 의식은 유달리 뛰어났던 서북 지역 사람들답게 학교 소풍은 고구려 고분이나 사찰로 잡는 경우가 많았고 이중섭은 거기서 고구려 벽화와 마주할 기회가 있었다고 한다. 어떤 전문가에 따르면 이중섭이 즐겨 그린 소 가운데에서는 꼬리의 강렬한 선이 특히 두드러지는데 이는 고구려 벽화의 영향이라고도 한다.

어쨌건 부잣집에서 자라서 이중섭은 미술 공부를 아쉽지 않게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스승도 잘 만났다. 오산학교 선생으로 왔던 임용련은 이중섭의 천재성을 발견하고 그를 격려해 주었다. 장래의 대화가라고 인정해 주는 선생 밑에서 이중섭은 자유롭게 미술을 배웠고 그의 독창적인 기법이나 화법은 이 즈음에 모티브를 둔 것들이 많다고 한다. 두꺼운 한지에 먹물을 들인 후 철필로 긁어 그 하얀 부분을 드러나게 하는 방식도 썼는데 바로 먼 훗날 껌종이 은박지에 그려냈던 그 기법과 유사하다는 것.

일본 유학 생활 중 그는 멋쟁이였다. 환영회에서 만장한 일본인 가운데 일어나 조선 노래를 신나게 불어젖힌 일은 유학생들 사이에서 환호를 받았고, 모든 운동에 만능이었다. 권투를 배워 조선인들에게 못되게 노는 일본인들을 때려 주기도 했고, 해수욕장에서는 육체미를 자랑하는 건장한 청년이었다. 이 멋있는 조선 총각은 일본의 한 양갓집 규수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그 역시 그녀의 포로가 된다. 일본 아내는 조선으로 건너왔고 이름조차 이남덕으로 역으로 창씨개명하여 이중섭의 슬픈 아내가 된다.

이중섭은 확실한 그림쟁이였다. 어려서부터 할머니가 사과를 주면 그를 그린 다음에 먹었고 새를 보면 나뭇가지에서 새가 떠날 때까지 지켜봤다는 그가 평생 동안 즐겨 그린 소재 가운데 하나는 소였다. 어찌나 소를 주의깊게 지켜봤던지 한 번은 소도둑으로 몰려 곤욕을 치르기도 한 일화는 유명하다. 이 그림 밖에 모르는 이,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평생 어려움도 모르고 살았던 이 화가는 해방과 분단을 맞으면서 되레 암울해지기 시작한다. 새롭게 한반도 북단에 들어선 인민공화국 정부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복무'하지 못하는 예술들을 흰눈으로 봤고 또 그들에게는 소련이라는 상전이 버티고 있었다. 예술동맹에서 이중섭의 그림을 소련 평론가들에게 보여줬을 때 그들은 "인민의 적" 판정을 내린다. <투계>같은 그림이 인민들에게 공포감을 준다는 것이다. 친구 한묵은 그의 월남의 이유를 표현의 자유를 찾은 탈출로 본다. "문화부의 허락을 받아야 전시할 수 있었는데 그림을 이데올로기적으로만 평가했기 때문에 왜 빨간꽃이 없냐는 식으로 시비를 걸었죠." 그것도 지긋지긋했지만 북한을 점령한 UN군이 퇴각한 뒤 감당해야 할 폭격은 현실적인 공포였다. 심지어 원폭까지 투하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일찍이 돌아간 아버지를 대신해 이중섭을 키웠던 어머니가 결단을 내린다. "중섭이 너 내려 가라."

함경도 일원 사람들은 육로로 탈출하기가 어려웠다. 중공군과 인민군이 빠르게 남하하여 원산 흥남 일원을 포위해 버렸기 때문이다. 이중섭 일가 또한 배를 타고 탈출했다. 그렇게 '자유대한'에 오긴 왔지만 북한 문화부 이상으로 지긋지긋하고 폭격만큼이나 무서운 존재가 그를 몸서리치게 환영했다. 그것은 가난이었다. "막내아이의 기저귀 한 장 없었습니다. 모든 재산이라 할 그림도 이북의 어머니께 두고 왔지요. 곧 다시 돌아갈 수 있을 줄만 알고 있었죠."(부인 이남덕) 평생 당해 보지 않았던 가난과 굶주림의 공포는 그의 육체와 정신을 좀먹는다. 아내는 버티다 못해 두 아들을 데리고 일본으로 돌아갔고 이중섭 역시 일본으로 갔다가 홀로 귀국한다. "형제들끼리 전쟁하고 있는데 어디 피란을 가겠는가 이거였지." (친구 김병기 화백)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커질수록 가난의 창이 몸을 찌를수록, 그는 그림을 멈추지 않았다. 구상의 회고다. "부두노동을 하다가도 그렸고, 다방 한구석에 웅크리고 앉아서도 그렸고, 캔버스가 없으면 합판이나 담배종이에 그렸고 물감과 붓이 없으면 못이나 연필로 그렸고....외로와도 그렸고 슬퍼도 그렸다....." 그렇게 그린 그림들을 모아서 그는 1955년 미도파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연다. 거기에 그는 은박지에 그린 그림, 유화, 소묘 등을 전시하여 호평을 받는데 난데없는 북한 문화부같은 남한 당국의 개입을 받는다. 가족을 생각하며 그린 그림들이 죄 나체화였는데 이는 '풍기문란'이니 철거하라는 것이었다. 이 사건은 이중섭에게 결정타였다. 발밑이 무너진다는 것은 이럴 때 쓰는 말일 게다. 그런 그에게 정신분열증과 거식증까지 찾아왔다. 친구 한묵의 회고는 참담하기까지 하다. "대구에 있던 중섭이를 시인 구상이 데리고 올라왔을 때 깜짝 놀랐어요. 통 먹지도 않고 사람도 몰라보고..... 육군병원에 입원을 시켰는데 거기선 사람을 묶어놓고 때려가면서 먹이는 거예요. 놀라서 다른 병원으로 옮겼는데 거기서는..... 전기찜질을 당했다더군요."

그리고 첫 개인전이 열린 1년 뒤 1956년 9월 6일 한국이 낳은 천재화가이자 남한과 북한당국이 모두 버려 버린 이중섭이 죽었다.



tag :

1945.9.7 통금의 시작

$
0
0
 
산하의 오역

1945년 9월 7일 통금의 시작


해방은 기쁨이었지만 혼란의 시작이기도 했다. 일본이라는 폭압적이었던 지배자가 하루아침에 몰락한 이후 누가 정국의 주도권을 쥘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견도 분분했고 움직이는 이들도 기민했다. '인공'이 성립하여 자치 조직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지만 그들이 과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모든 것은 인천에 상륙하는 미군에 달려 있었다. 좌우익을 막론하고 인천 부...
두에 달려가 '해방군'을 맞이하고 1백만 서울 시민이 열광적으로 미국을 환영하는 데에는 과연 어떻게 될까 하는 불안함과 기대감이 내재되어 있었다. 미군은 그 어정쩡을 확고하게 불식시켜 주었다. 임시정부고 인공이고 모든 형태의 자치 정부를 인정하지 않았고, 일본 관리들의 계속 복무를 명령했고, 소요를 일으키는 자는 엄벌에 처할 것이고, 미 군정 시의 공용어는 영어로 한다고 선언했다. 즉 정부 수립 이전까지 38선 이하의 조선을 다스리는 것은 미국이었다.

그 가운데 하나가 1945년 9월 7일 발표되고 8일부터 시행된 통행금지령이었다. 치안 유지를 이유로 미군 측은 서울과 인천 지역에 밤 10시부터 새벽 4시까지의 통행을 금지했다. 조선 시대에도 통행금지는 있었고 일제 시대에도 일부 유지되었기는 하지만 하지 중장 이하 미군 관리들이 별 생각 없이 내렸을 이 통행금지 포고령은 그대로 37년간 한국의 전통(?)이 된다. 전쟁을 겪으면서 통행금지는 전국으로 확대됐고 대략 12시에서 4시까지 4시간은 일종의 압수된 시간이 됐다.

도심에서 큰 시위라도 벌어질라치면 통행금지는 그 폭이 둘쭉날쭉했다. 4.19 때 계엄령이 떨어진 이후에는 통행금지 시간이 오후 7시였다. 부마항쟁 때에는 오후 10시가 통금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가족 모두가 어딜 갔다 오다가 통금이 10시라는 말을 듣고 걸음아 날 살려라 골목을 내달리던 기억이 생생하니까. ( 주택가까지 계엄군이 오지는 않았을 테지만) 그 37년간 한국인들은 너무도 통금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하나의 문화가 됐다. 한국인의 속전속결 술자리도 아마도 통금 때문이지 싶다. 퇴근하고 술자리에 둘러앉으면 7-8시인데 냅다 빨리들 먹고 취해야 했던 것이다. 그러자니 술잔을 돌리면 제꺽 술잔이 돌아와야 했고 (늦게 돌아오면 혼나고!) 그것도 안되니 맥주에 양주를 들이부어 폭탄을 제조하는 병기창이 항상 성황이었던 것이다. 물론 그래도 모자라는 주당들은 여관방 잡거나 술집 문 걸어잠그고 마시기도 했지만, 그래도 대부분 착한 사람들은 택시 전쟁을 치르며 집에들 들어갔다. 37년 뒤 전두환의 선심쓰기로 역사 속으로 통금이 사라질 때 유력한 반대의 목소리 하나가 "남편들 술자리가 길어질 것"을 우려하는 주부들의 것이었으니 그 분위기를 짐작해 볼 수 있겠다.

통금 사이렌이 울리면 그때부터 거리는 무인지경이 됐다. 방범대원과 경찰이 순찰을 돌다가 통금 위반자를 발견하면 불문곡직 파출소로 끌고 가서 유치장에 처넣었다. 꽤 큰 트럭이 돌아다니면서 위반자들을 짐칸에 쓸어담기도 했다. 상갓집에 갔다거나 병원에 가야 한다거나 등등 모든 핑계가 통하지 않았고 4시까지 꼼짝없이 창살 안에 앉아 있다가 즉결심판에 넘겨져 벌금을 내고 나와야 했다. "통금 위반으로 벌금" 이란 요즘의 향군법 위반만큼이나 흔한 '범죄 사실'이었다.

운이 좋은 곳도 있었다. 정부는 1964년 1월 18일 0시를 기해 제주도 일원에 걸쳐 야간통행금지를 해제했다. 이는 ‘치안상태가 좋고, 생업인 고기잡이 등 주로 통행금지시간에 일해야’ 하는 제주도의 특수사정을 감안하여 내린 결정이었다. 것이었다. 그리고 다음해인 1965년 3월 1일에는 충청북도 일원의 야간통행금지가 해제됐다. 그 이유라는 것이 충북 사람들로서는 매우 긍지를 가질만한 것이었다. “타도에 비하여 범죄발생이 극히 낮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으니. . 정부 공인 양반 충청북도가 아니겠는가.. 물론 더 큰 이유는 "지리적으로 사면이 육지로 둘러싸여 있어 해안선을 통한 간첩침투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었지만서도. 또 경주나 유성온천 등 각지의 관광 특구들도 통금에서 놓여났다. 기분이 확 드러워지는 것은 외국인 관광객들에게는 잃찌감치 통금이 적용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국인들은 얼씬도 못하는 밤거리에서 따로 할 일은 없었겠지만 그 무인지경의 밤거리를 활보하면서 외국인 관광객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통금에서 예외가 되는 날이 바로 크리스마스 이브와 제야의 종소리가 울리는 12월 31일이었다. 이 이틀간 도심 거리는 사람들의 발길로 메워지는 정도가 아니라 미어 터졌다. 젊은이들은 말할 것도 없고 꼬꼬마들 손 잡은 부모들까지 새벽 1시 2시의 밤거리를 쏘다니며 해방감을 누렸다. 기독교를 믿지 않는 집들이라도 아이들이 밤새 동네를 부르며 다니는 새벽송은 일종의 해방의 노래로 관대히 받아들였다. 그래 쟤들이 오늘이나 저러지. 그리고 연말연시가 끝나면 어김없이 통행금지 단속 강화 조치가 이뤄졌고 수많은 주당과 젊은이들이 '임검'에 붙들려 '연말연시 분위기에서 깨어나지 못한 철없는 국민'으로서 벌금을 맞고 나와서는 생두부를 씹어야 했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하나 있다. 해방 이후에 줄기차게 독재에 저항하고 목숨 걸고 독재자와 맞선 자랑스런 역사가 있는 우리이지만 '통햄금지 철폐하라'는 요구가 시위대의 주요 이슈로 부상한 적은 드문 것이다. 아마 지금 누가 통행금지령을 내린다면 전국 룸살롱 연합회부터 한국대학생연합과 택시노조와 대리운전기사연합과 각지의 상가 번영회까지 목숨을 걸고 머리띠를 질끈 매고 연대의 어깨를 걸 것이 분명하고, 기실 범죄 예방 (이는 통금의 가장 큰 명분이기도 했다) 등을 이유로 전 국민의 하루의 1/6을 빼앗아 가는 만행적인 행정이었음도 자명한데, 통금 자체는 놀랍게도 한국인의 생활에 당연하게 수용되었고, 그에 대한 이렇다 할 문제의식 없이 익숙하게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승만을 무너뜨리고 박정희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시위를 감행하면서도, 그 다음날 방범대원이 "어이 학생 이리 와! 통금 넘었어!"를 외치면 아 씨바 재수없네 순순히 트럭에 타고 파출소로 향했던 이 묘한 광경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언젠가 박노자 교수가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 중의 하나로 그렇게 격렬하게 독재에 저항하고 체제의 모순타파를 위해 노력하던 한국 학생 운동에서 다른 나라에서는 참으로 흔했던 "병역 거부 시위"가 거의 전무하다시피 한 현상을 든 바 있었다. 하긴 그렇다. 우리는 어디 당사를 점거하거나 관공서를 습격하여 징역 처벌을 받음으로써 군대를 "정리"할 생각을 했지, '미제의 용병'이든 '파쇼의 수족'이든 군대에 가지 않겠다고 시위를 하거나 사회 운동으로 승화된 적은 없는 것이다. 군대는 당연히 가야 되는 것이었고, 그건 뭔가 부인할 수 없는 일상이었다. 통금도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미군정을 맡은 미국 군인들이 낯선 나라에 오면서 느꼈던 불안감과 그 나라의 치안을 장악해야 한다는 조바심으로 내렸을 것이 분명한 '통행금지령'이 1945년 9월 7일로부터 37년 동안 한 나라의 하루 중 일부를 꼼짝없이 거머쥐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면 아마 저승의 하지 중장 이하 미군 장교들은 언빌리버블!!!!을 외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정말 우리 왜 그랬을까



tag :

1934.9.8 조선 혁명군 총사령 양세봉 최후의 날

$
0
0
산하의 오역

1934년 9월 8일 조선혁명군 총사령 양세봉

남과 북이 원수처럼 갈라서고 수많은 피를 호상간에 뿌린 이후 양쪽의 국립묘지는 만원사례를 이뤘다. 또 그곳에 묻힌 사람들은 대개 한쪽의 적이었고 단지 그가 그곳에 묻혀 있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쪽에선 무시되거나 배제되기 십상이었다. 한쪽에 의해 추앙받는 사람은 한쪽에선 역적이었고 한쪽에서 손가락질 받는 이가 한쪽의 영웅으로 등극하는 일은 흔하디 흔했다. 그런데 유일...
하게 남과 북 양쪽에서 존경받으며 비록 시신없는 허묘일망정 남과 북의 국립묘지 모두에 그 유택을 남기고 있는 사람이 있다. 양세봉이라는 사람이다.

그는 평안북도 철산 사람이고 어려서 집안이 빈한하여 동네 서당의 소사 일을 하면서 지냈다. 그러던 중 그가 열 다섯 살 나던 해 대한제국이 멸망한다. 초야에 묻힌 우국지사였던 훈장은 그날로 글 가르치는 일을 그만 두고 마을을 떠난다. “나라가 망했는데 글이 무슨 소용이랴?”했을 수도 있고 훗날의 양세봉같이 독립운동을 시작하려는 마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어쨌건 훈장은 양세봉의 아버지에게 양세봉의 미래를 예고하는 듯한 말 한 마디를 남긴다. “세봉이는 영특한 아이입니다. 평생 농사를 지을지언정 일본놈들 위해 일하게 하지는 마시오.”

아버지는 그 말을 지킬 새도 없이 일찍 세상을 떴고 양세봉은 가족들을 거느린 10대 가장이 되었다. 식민지 조선 땅에서 땅 부쳐 먹기도 쉽지 않았던지 양세봉은 가족들과 함께 압록강을 건넌다. “내 조국 산천을 등지고 건너는 압록강 목메어 부르는 불망의 조국” 당시의 수많은 농민들과 같이, 또 압록강 이남으로부터 눈을 떼지 못하고 복수심에 불타오르던 독립군들과 같이. 그가 자리잡은 것은 지금의 요령성 신빈현이었다. 지금은 퇴락한 마을에 불과하지만 1920년대 말 신빈현 내 왕청문이라는 곳에는 독립군 통합 정부인 국민부의 수도가 자리잡고 있었고, 조선족 교포들은 그곳을 ‘서울’로 부를 정도였다.

양세봉 역시 일생을 중국인 땅 부쳐먹으며 보낼 팔자는 못되었다 1919년 3.1 봉기 당시 현지에서 독립만세 시위를 조직했던 그는 1920년을 넘어서면 이미 총을 들고 싸우고 있었다. ‘천마산대’라는 독립군 조직의 일원으로 압록강을 넘나들며 일본 경찰서와 금광 사무실을 기습하기도 했고 독립군들의 훈련을 맡아 정예병력으로 조련함으로써 독립군 수뇌부의 신임을 받기도 했다. 그의 활약 가운데 극적인 순간 몇 개를 들어 보면 이렇다. 한 번은 일본의 부영사가 봉천으로 이동한다는 소식을 듣고 매복을 하고 있었는데 대장이 주저하여 명령을 내리지 못하자 양세봉이 나서서 공격을 퍼부은 다음 총알이 떨어지자 빈총을 들고 나서서 일본군을 위협하며 무장해제를 시킨 일이다. 그리고 일제가 가장 화들짝 놀란 순간은 1924년 사이토 총독 저격 미수 사건일 것이다. 사이토 총독이 압록강 경비정을 타고 순시에 나설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한 양세봉은 일제의 만주쪽 절벽에 저격수를 배치한다. 경비정이 가까이 접근하지 않아 성공 가능성은 적었지만 사이토 총독의 배를 향해 총구들이 불을 뿜었고 유유자적하며 자신의 치지(治地)를 돌아보던 대일본제국 조선 총독 사이토는 체면무시 전속력으로 달아나야 했다.

그로부터 근 10년 동안 양세봉은 독립군의 지휘자로, 그리고 만주 사변 이후 일제의 침략이 만주 전역을 뒤덮을 때는 중국 무장 세력과 연합한 조선혁명군 총사령으로 일제와 싸웠다. 대다수의 독립군들이 좌우익으로 갈려 좌익들은 중국 공산당 휘하로 들어가고 우익들은 상해 등 중국 본토로 넘어갔을 때 만주에 남아서 일제와 싸운 것은 양세봉의 조선 혁명군 500여명이었다. “아무리 사고를 낸 부하라고 하더라도 부하에게 욕설하는 일이 일절 없었고 부하에게는 궐련을 사주면서 자신은 엽초를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피웠다.” (부하 계기화의 회고)는 겸손하고 인간적이었던 양세봉은 영릉가 전투 등 수많은 전투를 치르며 일본군 천여 명을 죽였고, 수백 명을 국내에 잠입시켜 공작을 펼치기도 하면서 만주 지역 일본군 최대의 공적이 됐다. 독립투쟁 역사상 그만큼 한 지역에서 오랫 동안 터를 잡고 버티며 일본군에 저항한 사람은 없었다.

그는 민족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였고 만주에서 벌어진 좌우익 상잔의 중심에 서 있기도 했다. 일본에 맞선 상황이었지만 조선인들은 좌우익으로 나뉘어 극심하게 대립했고 서로 공격하고 죽이는 일도 심심치 않게 일어났다. 그때 양세봉은 우익의 대표로 좌익과 맞섰고 좌익들에게 원수로 찍힐 정도였고 ‘극우’라는 평까지 듣는다. “좌익들은 조선혁명당 책임자 현익철, 총사령 양세봉, 그리고 참모장인 나 (김학규)를 3대 살인 반동 영수라고 불렀다.” (김학규) 의형제를 맺었던 김형직의 아들 김성주 (후일의 김일성)를 만났던 것도 그 즈음의 일일 것이다. 김일성 주석의 자서전 <세기와 더불어>에서는 공동 반일 투쟁을 제안하는 김일성에게 이런 말을 하는 양세봉이 등장한다.

“그건 다 좌익에 섰다는 층이 정치를 잘못하는 탓이야. 대장도 좌익이라니 그런 물계는 잘 알겠지만 그들이 투쟁을 과격하게 내밀기 때문에 인심을 잃었단 말일세. 소작쟁의를 해서 농사군들을 폭군으로 만들구, 무슨 적색 5월이요 해가지고서는 지주를 처단하구 이렇게 하니까 중국사람들이 조선사람들을 소 닭 보듯이 하거든. 이건 순전히 공산주의자운동을 한다는 사람들의 실책이야.” 이 말에 대해 김일성은 이런 해석을 내린다. ‘양세봉 자신도 독립운동에 관여하기 전까지는 지독한 영세농민으로 고생을 많이 해온 사람이었다..... 무우시래기에 피쌀을 섞어서 쑨 죽을 기아의 해들을 기적적으로 돌파해온 빈농민의 후예였다. 초기공산주의자들이 대중운동을 지도하는데서 범한 좌경적 오류는 유감스럽게도 새 사조를 동경하던 많은 사람들의 넋속에서 공산주의에 대한 애정을 추방하는 가슴 아픈 결과를 빚어냈다. 나는 양세봉사령과의 담화를 통해서도 만주지방에서 공산주의 기성세대가 범한 과오의 후과가 얼마나 막대한가 하는 것을 다시 한 번 새삼스럽게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주 벌판을 누비던 조선 호랑이, 좌익에 동조하지 않은 소작민 출신의 장군, 만주 군벌이었던 장학량의 수하로부터 “관우와 같은 능력자”라는 찬탄을 받았던 양세봉의 무운은 ·1934년 양세봉 잡기에 혈안이 된 일제에 매수된 밀정에 의해 끝난다. 1934년 9월 8일 중국 산림대 (마적단이라고 봐야 옳겠다)와의 제휴 제안을 받고 협의차 그들의 근거지로 가던 중 양세봉 일행은 일본군의 기습을 받는다. 밀정 또한 총을 빼들고 “죽기 싫으면 일본군에 투항하라.”고 다그치는 상황에서 양세봉은 눈을 부릅뜨고 호통을 치며 저항했고 결국 일본군에게 죽음을 당한다. 동지들이 그의 시신을 수습해 봉분 없는 평토장으로 일단 모셨지만 집요한 일본군은 이 무덤을 파헤치고 목을 잘라 통화 시내에 효수했다. 그리고 그는 남북의 공동묘지에 모두 이름을 올린 거의 유일한 사람으로 남아 있다.



tag :

1900.9.9 전주 신흥학교 개교

$
0
0
산하의 오역

1900년 9월 9일 신흥학교 개교

요즘 신앙심 유별난 한국 사람들이 아프가니스탄으로 가듯, 19세기 말 조선은 사명감에 불타는 선교사들의 홍수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이 자칭 사람을 낚는 어부들은 조선 사람들을 낚기 위해 쌍끌이 그물을 들고 덤볐고 그러다보니 구역싸움에 선교사들끼리 팔뚝질을 하거나 남이 뜸들인 밥을 가로채거나 하는 불상사가 잇따랐다. 이 꼴을 지켜보던 프린스턴 출신의 네비우스 목사는 ...
조선의 지역을 분할하여 각 교파마다 나눌 것을 제안한다. 이에 따라 남장로교는 충청도와 전라도, 호주 장로교는 경상남도, 캐나다 선교회는 함경도, 북장로교는 평안도, 황해도, 경상북도를 차지(?)하고 각자의 선교 지역에 전력을 기울인다.

이 분할에서 충청도와 전라도를 맡은 것은 남장로교였다. 유니언 신학교 출신이 주류를 이룬 남장로교 소속 선교사들 중 일부는 조선 왕조의 발상지이자 “인구 5만 (당시)의 아름다운 도 시” 전주에 주목했다. 갑오농민전쟁 후 포교를 본격화한 그들이 택한 방식 중의 하나는 교육이었다. 단 여기서 교육은 일반적인 교육이라기보다는 자신들의 선교를 도울 인재를 양성하고자 하는 목적이 강했다. 처음에는 14명의 남자를 대상으로 ‘성경학교’를 열었다가 1900년 9월 9일 레이놀드 목사의 집 사랑채에서 단 한 명의 학생이자 첫 세례교인이었던 김창국을 학생으로 한 근대교육 기관이 문을 연다. 이것이 신흥학교의 시작이다. 김창국은 후일 목사로 대성하는데 그 아들 중의 하나가 386들이라면 교과서에서 배웠을 시 <가을의 기도> 시인 김현승이다.

기독교인 학생들을 위주로 받는다는 선교사들의 방침 (“전체 학생 중 60퍼센트는 기독교인이 되어야 한다”는) 때문에 여러 가지 곡절도 있었지만 점차 신흥학교는 전주 지역의 이른바 ‘신식 교육’의 메카가 되어 갔고 동시에 일본의 강압에 삐딱한 교사들이 모여들어 ‘월남 망국사’나 ‘미국 독립사’ ‘폴란드 망국사’ 등을 가르치며 학생이고 선생이고 울분을 토하는 꼬장꼬장한 학교로 발전해 갔다. 1908년에는 기와집 8 간을 지어 어엿한 학교를 세우고 그 이름을 신흥학교로 정하니 이는 새 여명을 뜻하는 New Dawn의 한역이었다.

신흥학교 초기 역사에는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몇 있는데 그 중 하나는 1회 졸업생 안영열의 것이다. 원래 그는 가마에 타고 학교에 오는 갑부집 아들이었다. 그러던 그가 교육을 통해 개화하고 평등 의식이 싹트면서 자신의 종을 모두 해방하고는 자신의 토지들을 쪼개 나눠 줘 버렸다. 이후 그는 운동장을 닦으면서 고학을 하며 학교를 다녔다고 한다. 또 하나 초기 신흥학교 교사의 회고를 보면 미국 선교사들의 입장을 엿볼 수 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총독부 관리와의 대담에서 한 조선인 교사는 일본어를 말하라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계속 조선어를 썼고 이에 여부솔 (에버솔 선교사) 교장에게 압력이 들어가자 여부솔 교장은 교사에게 총독부에 밉보이지 말 것을 읍소했고, 그래도 말을 들어먹지 않자 총독부 관리가 올 때마다 그를 잠시 가두기까지 했던 것이다.

이후 3.1 운동이나 광주 학생 운동에서나 신흥학교 출신과 재학생들의 활약은 눈부신 바 있는데 가장 극적인 순간은 신사참배 논란 때 일어난다. 일제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학교들은 폐쇄시키겠다는 입장을 고수했고, 감리교나 기타 몇몇 교단은 그에 응했다. 신사참배 문제는 좀 묘한 구석이 있다. 일부 기독교의 강력한 반대는 민족적인 이유보다는 신앙적인 측면이 강했던 것이다.

신흥학교를 세운 남장로교가 그랬다. 학부모 학생, 교사들은 어떻게든 학교는 유지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의견이 강했지만 안톤 교장은 폐교를 각오하고 신흥학교 소속 학생들의 신사참배를 금지한다. 그러던 중 일왕의 중일전쟁 칙서 반포를 기념하는 9월 6일, 일본 경찰은 신흥학교생 전원을 휘몰아 신사로 향한다. 안톤 교장이 막아서지만 막무가내였다. 학교에 다니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망할 놈의 신사에 절을 해야 하는가 아닌가 학생들의 마음도 복잡했을 것이다. 눈물을 흘리며 자신들을 지켜보던 교장 선생님 얼굴도 떠올랐을 것이고. 결국 신사참배 구령이 떨어졌을 때 허리를 굽힌 사람은 일본 경찰 밖에 없었다. 신흥 학생들은 뻣뻣이 허리를 편 채 돌아서 퇴장했고 함께 갔던 기전학교 학생들은 주저앉아 땅을 치고 울어 버렸다. 신사참배는 엉망이 됐고 신흥학교는 폐쇄된다.

그 유구한 반골기질은 1980년 5월 27일에도 재연된다. 계엄군이 도청을 함락하고 사람 사냥을 끝내던 그 시점에서 신흥고 학생 1천5백명은 계엄 철폐와 광주 학살 규탄을 외치며 시위를 벌인 것이다. 교문 밖으로는 수백 명의 군경이 총을 든 채 달려 왔고 물불 안가리던 전두환 일당의 속성상 학생들이 교문을 박차고 나간다면 그대로 피를 볼 판이었다. 교사들은 우리를 밟고 가라며 학생들을 막아섰고 학생들은 차마 교사들을 넘어서지 못하고 해산한다. 물론 이 일로 20여명의 학생들은 학교를 떠나야 했지만.

2000년 이 학교가 100주년을 맞은 해, 이 학교 학생들은 전혀 뜻밖의 장소에서 자신들의 교가를 듣게 된다.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 당시 트랩을 내리는 김대중 대통령을 환영하는 자리에서 인민군 군악대가 난데없는 신흥고 교가를 연주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이는 신흥고 교가가 아니라 일제 강점기 만주의 독립군들이 부르던 ‘용진가’였지만 그 곡조가 신흥학고등학교 교가와 완전히 같았던 것이다. 그 원조가 신흥학교 교가인지 신흥학교 출신이 독립군가로 부른 것인지는 모르나, 1910년대에 이미 신흥학교 교가로 이 노래가 불리우고 있었다는 증언이 있으니 그 역사 또한 깊은 사연이 도사리고 있을 것이다. 2000년 당시 조선일보가 자발없이 이 노래는 “민족이 모두 힘을 합쳐 미 제국주의를 치자는 가사”라고 썼다가 망신을 당했던 것은 그 역사를 장식하는 작은 악세사리일 것이고.

1900년 9월 9일 전주 신흥학교의 역사가 한 사람의 학생으로 열렸다.


tag :

1976.9.11 7분에 3골 차범근 용되다

$
0
0
산하의 오역

1976년 9월 11일 7분에 3골 차범근 용되다

얼마 전 고대와 연대의 정기전에 딸을 데리고 갔었다. 고대 방송국이 제작한 영상 가운데 낯익은 스타들이 등장하여 고대의 승리를 기원하는 꼭지가 있었는데 그 서두를 장식한 스타가 차범근이었다. 우리 딸도 "차두리 아빠!"를 외쳤으니 적어도 그 자리에 임석한 수만 군중 가운데 그의 얼굴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한국 축구가 낳은 최고의 스타 가운데 한 사람이며, 요즘의 EPL과 맞먹는 권위를 지녔던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아흔 여덟 골이라는 골을 집어넣은 골잡이. 그 차범근이 한국인들의 뇌리에 깊숙히 틀어박힌 날은 1976년 9월 11일이었다.

태국의 킹스컵, 말레이시아의 메르데카 배 등 고만고만한 동남아 국가들이 치르던 국제 축구 경기 대회를 못내 부러워하던 박정희 대통령은 대통령배 국제 축구대회를 연다. 이름하여 '박스컵' 하늘을 나는 새를 떨어뜨리는 정도가 아니라 박제가 된 새도 날아가라 하면 날아갈만큼 무서운 권력을 휘두르던 박정희 대통령 각하의 이름을 딴 대회였다. 처음에는 동남아 국가들만 불러서 토닥토닥하는 경기였지만 회를 거듭하면서 브라질 프로팀도 불러오고 유럽 팀도 불러와서 국제 축구 대회의 격에 맞는 대회를 조성하려고 노력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관중이었다. 한국팀 경기야 미어터졌지만 기타 경기는 개미들만이 발에 땀을 쥐고 지켜보는 경우가 많았는데 가카가 무심코 채널을 돌리시다가 자신의 이름을 딴 명예로운 대회의 경기장이 텅텅 빈 모습을 보시면 이 아니 불경스러운 일이랴. 그래서 인근 고등학교들에 몽땅 휴교령을 내려 스탠드를 꽉곽 메운 것이 여러번이었다고 한다. 하여간 그때는 거의 남한도 북한이었다.

각설하고, 1976년 박스컵. 한국 대표팀은 화랑과 충무, 1진과 2진으로 나뉘어져 참가했다. 화랑팀에는 김호곤 박성화 황재만 최종덕 박상인 이영무 70년대 축구 좀 본 사람들이라면 생생하게 기억할 이름들이 버티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 주전 라이트윙 차범근이 있었다. ('사이드 어태커'가 요즘 말이라지만 나는 라이트 윙 레프트 윙이 더 찰지게 입에 와 닿는다.) 화랑팀은 개막전 상대로 말레이시아를 만난다. 나는 말레이시아라는 나라가 다양한 인종들이 섞여 있는 나라임을 축구를 통해 알았다. 골키퍼 아르무감이야 말레이 인종 이름인 것 같고, 제임스 웡 같은 이는 한눈에 혼혈같이 보였는데 한국 공격진에게는 웬수같은 이름이었던 수비수 소친원은 분명히 화교였던 것이다. 1976년 그 해 말레이시아 대표팀의 수비도 이 소친원이 이끌고 있었다.

말레이시아에 곧잘 덜미를 잡히곤 했지만 그래도 말레이시아에 '완패'를 당할 실력은 아니었는데 이날은 이상했다. 어처구니없는 수비진 실수에다가 비만 오면 방방 뜨는, 수중전에 관한한 능력자였던 말레이시아의 공격진에 글쎄 전반전에만 3대0으로 넉다운을 당한 것이다. 후반전에 박상인이 어떻게 한 골을 넣었지만 말레이시아는 냉큼 또 한 골을 추가해 버렸다. 4대 1.

이 정도 스코어에 7분 남은 시간이라면 동네 축구에서도 볼짱다본 상황이다. 관중들은 안그래도 못하는 것들을 화랑이니 충무니 하면서 나눠 놨다고 욕지거리를 내뱉으면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어디 브라질도 아니고 말레이시아한테 4대1이라니 그냥 축구화 한강에 던져 버려라는 저주도 곳곳에서 튀어나왔다. 바로 그때 차범근의 왼발슛이 말레이시아 네트를 뚫었다. 나가던 관중들이 멈춰 섰지만 현실은 그래봐야 4대2였다. 슬금슬금 다시 출구를 향해 나서던 발걸음들이 다시 얼어붙은 것은 그리고 지축을 박차고 튀어오른 것은 4분뒤 42분이었다. 차범근이 또 골을 넣은 것이다. 관중들은 순간 제정신이 아니었다. 말레이시아 선수들도 마찬가지였다. 지금까지 가지고 놀던 한국팀은 어디로 가고 웬 도깨비같이 빠른 녀석이 문전을 헤집더니 두 골을 넣어버렸다.

그래도 3분만 버티면 된다 싶어 공을 내차던 말레이지아 대표팀 선수들이었지만 무슨 약먹은 것처럼 밀고 들어오는 한국 공격진에 완전히 압도당했다. 키 작은 스트라이커 김진국이 날카롭게 슛을 한 공이 문전으로 흘렀다. 그때 차범근이 나는 듯이 달려와 다리에 공을 걸치고 그냥 주저앉듯 밀어넣었다. 좀 폼은 안나는 골이었지만 기적같은 동점골이었다. 귀신에 홀린 표정을 하고 선 말레이지아 선수들과 흙탕물 고인 잔디 위에서 기뻐 날뛰는 한국 선수들은 묘한 대비를 이루었다. 초등학교 1학년이었던 나 또한 축구의 맛이라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그때까지 차범근은 하고 많았던 대표팀 라이트 윙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 해트트릭으로 그는 한국.축구 전설의 반열에 오른다. 이후 그가 이룩한 금자탑에 비하면 그 전설이 빛이 바랠 지경이지만 그날의 해트트릭은 금자탑의 초석으로 모자람이 없는 승부였다. 그의 화려한 이후 경력과 사연을 적기엔 시간이 모자란다. 그가 축구 교실에서 가르치던 한 소년이 묘사한 그의 가장 멋있는 모습 하나만 소개해 본다.

내 기억에 그의 팀이 프랑스 월드컵에서 네덜란드인 히딩크에게 팀에 오대영 패대기질을 당한 뒤 나라를 팔아먹은 듯한 역적으로 몰려 월드컵 도중에 귀국하고 얼마전 진상이 드러났던 승부조작 얘기를 했다가 제명까지 당하는.등 인생 최악의 시기 또는 그 언저리에서 대놓고 소외받던 시절의 일이다. 한 소년이 인터넷 까페에 한 사진을 올리면서 이렇게 얘기한다. " 뒤에 망치들고 계시는 저분 저분이 바로 우리 감독님 이시다.우리다칠까봐 망치들고 얼음 깨는 저분. 저분이 바로 세계속의 갈색 폭격기 우리 감독님이시다."

인생 최악의 순간에서도 도피하거나 웅크리지 않고 자신이 해 온 일을 포기하지 않았던 차붐. 적어도 그 순간 그 소년에게 차범근은 축구의 스승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tag :

1979.9.13 "엉터리 재판 집어치우시오"

$
0
0
산하의 오역

1979년 9월 13일 사형수 오휘웅

한 청년이 있었다. 1979년 9월 13일 그가 사형대에 올라갈 때 나이가 만 서른 넷이었으니 1974년 그와 한 여자, 그리고 그 여자의 가족 모두를 파괴해 버린 끔찍한 일이 있었을 때 그는 20대의 총각이었다. 그는 나무호랭객교, 즉 일련정종 불교회의 포교사였고, 사진으로 볼 때 꽤 준수하게 생긴 보통 청년이었다. 그런데 포교 활동 도중 한 여인을 만난 것이 ...
그에게는 불행이었다. 여자의 증언에 따르면 청년은 그에게 '반장' 직위를 주고 잘 대해 주었다고 한다. 둘 사이는 치정 관계로 발전했고 특히 여자는 그에게 매달릴만큼 좋아하게 된다. 하지만 남자는 좀 생각이 달랐던 것 같다. 그를 열렬히 좋아하는 처녀도 있었고, 혼담도 무르익어 가는 상태였다. 더구나 여자는 애 둘의 엄마였다.


그러던 중 1974년의 해가 저물던 12월 30일 그 여자의 집에서 살인이 난다. 하나도 아니라 셋 씩이나 죽은 것이었다. 병약하여 아내의 불만을 샀던 남편과 그 아이 둘이 모두 수면제를 먹고 잠든 상태에서 목이 졸리고 칼에 찔려 세상을 떠났다. 처음에는 강도 사건으로 위장하려 했지만 사실은 착착 드러난다. 소주에 수면제를 탄 것은 여자였고, 아이들을 잠재운 것도 그녀였다. 그녀는 범인으로 남자를 끌어들인다. 남자가 자신을 사랑하여 함께 살자 했고, 저것들만 없으면 당신과 행복할 수 있다고 유혹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경찰 조사에서 그녀는 "나 때문에 벌어진 일이니 저이가 죄값을 치른 뒤엔 함께 할 것"이라고까지 얘기한다. 경찰과 검찰에서 자신의 범행을 부인하던 남자는 모종의 심문(?) 끝에 자기 죄를 인정했지만 법정에서는 또 다시 부인한다. 나는 그들을 죽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때 여자의 태도가 돌변한다. 공범에 대한 배신감 때문인지 아니면 남편과 자식들을 죽이면서까지 매달리고자 한 남자가 저 혼자만 빠져나가려는 데 대한 분노인지 알 길은 없으나 남자를 "악독한 자"로 지칭하며 사형에 처해 달라고까지 요구하는 것이다. 남자는 유력한 알리바이가 있었고 이에 대해 증인을 신청한다. 일련정종 지역회관의 사무장과 그 신도들이었다. 그들에 따르면 사건 당일 남자가 저격 7시 30∼40분 사이에 회관에 도착했다가 밤 8시 10∼20분 사이에 좌담회에 간다고 회관을 나갔다고 증언했다. 이는 사건 직전과 직후에 남자가 그들과 함께 있었다는 뜻이다. 여자의 몸에는 피가 묻어 있었는데, 정작 칼을 휘둘렀다는 남자는 핏방울 하나 묻어 있지 않았고 태연하게 얘기 나누고 설교를 했다는 것이다.

이 증인 신청 직후 뜻밖의 일이 벌어진다. 여자가 그예 구치소 안에서 목을 매 버린 것이다. 용의자 중의 하나이자 가장 유력한 증인이자 목격자이기도 한 이가 일거에 사라진 것이다. 이 말을 들은 남자는 "이제는 빠져나갈 수 없게 됐다."고 내뱉았다고 한다. 이제 용의자는 세상에서 하나 뿐이었다. 더구나 그녀의 마지막을 지켜본 여자 수용자들은 여자의 마지막 말을 이렇게 술회했다. " '남자 쪽은 변호사를 대고 증인이 2명이라 나는 불리하다'고 하면서 나를 증언해줄 사람은 하나도 없다고 낙심하고 있었으며, 죽기 30분전쯤에는 '누명쓰게 됐다'고 연거푸 네 번씩이나 말을 한 후 결국은 죽었습니다." 그들에 따르면 여자는 아이들을 부르며 눈물을 흘렸다고 하며 아이들에게 새옷을 입혀 준 꿈을 꾸었다고도 했다. 그리고 그들에게도 범인은 남자라고 누차에 걸쳐 주장했다고 한다.

죽음 앞에선 누구나 진실해진다는 것은 일반적인 상식이다. 남자의 예감대로 재판은 진행된다. 그리고 사형 선고를 받는다. 하지만 그는 계속해서 무죄를 주장한다. 일련정종의 독실한 신자이자 포교사였던 그는 기독교로 개종하면서까지 마지막 희망을 잡으려 애쓴다. 신이 있다면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리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고, 신에 대한 용서와 귀의를 종용하던 교화사와 부딪치기도 했다. (이 해프닝은 교도소에서의 교화 작업이 기독교와 천주교에 국한되어 있었던 현실 탓도 있을 것이지만) 1979년 9월 13일 마침내 사형 집행 명령이 떨어진다. 이 사건을 심층 취재했던 조갑제 기자의 역작 기사 <사형수 오휘웅> 중에서 사형 당일 일어났던 일을 옮겨 본다. - 남자의 이름이 오휘웅이다.


"1979년 9월 13일, 드디어 그날이 오휘웅씨에게 찾아왔다. 오씨가 연출조에 이끌려 구치감을 나섰을 때, 그를 맞은 당시 교무계장 황정남씨에 따르면, 오씨는 당황하지 않고 중심을 딱 잡고 있더란 것이다. 사형장까지 난 길 양쪽에 서 있는 낯익은 구치소 직원들을 보고는 '감사합니다' '나 먼저 갑니다'고 일일이 인사를 했다는 것이다. 그 모습을 본 직원들은 오씨가 '아주 양순하게 가줄' 것이라고 믿고 안도했었다고 한다. 사형수가 구치감을 나설 때의 태도를 보면 그가 어떻게 죽을지 대충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날 오씨는 강도살인범 전광국씨 등 일곱 명의 사형수 가운데 세번째로 집행장에 끌려 왔다. 앞의 두 사람이 처형될 동안, 오씨는 감방에서 불안 속에서 기도를 올리면서 '혹시 내 차례가 아닌가' 가슴을 두근거리며 기다렸을 것이다. 오씨가 사형집행장 마루 위 돗자리에 앉혀진 것은 오전 11시 반쯤이었다. 인정신문 뒤 집행관이 '법무부장관의 명령에 따라 지금 이 자리에서 사형을 집행합니다. 유언이 있으면 하십시오'라고 하자 오씨는 모든 사형수가 그러듯 잠시 멈칫했었다고 한다.

오랫동안 사형에 대비해온 사람도 유언을 하라고 할 때 죽음을 더욱 실감하게 되고, 집행의 순서를 모르고 형장에 나오기 때문에 갑자기 할말이 떠오르지 않아 으레 멈칫한다고 한다. 오씨도 입에서 침이 마른 듯 머뭇머뭇하다가 어렵게 입을 멨다. 처음 몇 마디는 떨렸으나 곧 당당하게 큰 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꿇어앉아 합장기도 하는 자세였다.

'절대로 죽이지 않았습니다. 하느님도 아십니다'
'하느님, 천당 가게 해주십시오. 저는 절대로 죽이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하느님도 알고 계십니다. 저의 유언을 가족에게 꼭 전하여 제가 죽은 뒤에라도 이 원한을 풀어주도록 해주십시오. 여기·검사·판사도 나와 있지만 (필자주 : 판사는 집행장에 안 나옴) 정신 바짝 차려서 저와 같이 억울하게 죽는 이가 없도록 해주십시오. 이런 엉터리 재판 집어치십시오! 저는 기독교인으로 죽습니다.'

대강 이런 취지의 말 끝에 오씨는 저주를 남겼다. '죽어 원혼이 되어서라도 위증한 사람들과 고문수사한 사람들과 오판한 사람들에게 복수하겠다'는 가슴 서늘한 이야기였다. 오씨가 이 저주를 할 때는 자제력을 잃은 듯 흥분했었다고 한다. 형장에 있었던 사람들 중엔 소름이 끼치더라고 실토한 이도 있었다.

오씨는 그뒤의 집례에 양순하게 응했고, 집행에도 의연하게 따라주어, 사형집행인들이 흔히 쓰는 표현을 빌면 '편안하게 잘 갔다'고 한다. 오씨가 밧줄에 매달려 있는 동안 집행 참여자들은 건물 바깥느티나무 밑으로 나가 담배를 피우며 잡담을 했다. 서울구치소 보안과장이 참여 검사에게 물었다.

'영감님, 오판 아닙니까?' 검사는 교무계장에게 '억울하다고 죽는 사형수가 많습니까?' 하고 물었다. 계장은 '아니오. 나로선 처음입니다'고 했다. 보안과장이 '상담할 때도 그랬어?' 하고 다시 물었다. 계장은 '그걸 모르셨어요? 오휘웅이는 안죽인 것 같아요'라고 했다. 검사는 이때 말없이 땅만 내려다보더라는 것이다. "

그가 정말로 범인이었는지 아닌지는 알 길이 없다. 담당 형사들은 지금도 그가 범인이라고 믿고 있다고 하며, 판사는 조갑제 기자에게 "사건의 일부를 본 사람과 전부를 들여다본 사람의 차이"를 얘기하며 오휘웅을 무죄로 몰아간 기자를 못마땅해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나는 사형 폐지론자가 아니다. 사형이라는 극형의 존재 자체는 필요하다고 본다. 죽어 마땅한 이들에게 죽음의 공포를 강제하는 것은 때로는 정의라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휘웅의 마지막 날을 생각하면 그 생각이 좀 흔들린다. 정말로 그가 억울하게 죽었다면 그 책임은 누가 져야 하는가. 나라가 조사하고 나라가 판결하여 무고한 한 생명을 거둔 것을 어떻게 책임질 수 있으며 무슨 수로 보상할 수 있으며, 오휘웅이 내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신과 사후를 믿는 자로서 그는 그 범죄의 유무에 따라 처분을 받았으리라 믿지만, 만약 그가 무죄였다면 과연 그를 일찍 신에게 보낸 이들은 신 앞에서 어떤 대답을 하여야 하며, 어떤 처분을 받게 될까. 1979년 9월 13일 오휘웅은 이런 엉터리 재판 걷어치우라고 외치며 목이 매달렸다.



tag :

1982.9.14 잠실벌의 한대화

$
0
0
산하의 오역

1982년 9월 14일 잠실벌의 한대화

요즘에야 전 세계에서 한국 야구를 우습게 보는 나라는 없다. 야구의 종주국임을 민망할이만큼 자랑하는 미국도 유구한 프로야구 역사를 자랑하는 일본도, 한때 카스트로도 프로야구 선수가 꿈이었을만큼 야구를 좋아하고 전력도 최강인 쿠바도 한국에게 고배를 듵 적이 많은 것이다. 사실 월드베이스볼클래식이랍시는 대회에서도 한국은 충분히 우승할 수 있었다. 일본을 두 번씩이나 이겼어도 한판에 지는 바람에 분루를 삼킬 뿐이었지만.

한국 야구가 국제 규모 대회에서 첫우승을 차지한 것은 1977년의 슈퍼 월드컵이었다. 최동원과 이선희, 최강 좌우완의 합작과 황규봉 김용남 등등의 투수들이 힘을 다해 던지고 김재박이나 김일권 등 준족호타들이 기염을 토한 결과이기도 한데 사실 이 우승은 세계 최강의 의미와는 거리가 있었다. 일단 쿠바가 안나왔었고, 진짜 야구의 프로(?)들은 미국과 일본의 프로야구에 다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푸에르토리코, 니카라과 등 북중미 강호들은 출전했고 최동원의 '인간같지 않은' 활약은 진실로 대단했으며 엄연히 우승은 우승, 세계 제패는 제패였다. 감독 김응룡 이하 전 선수단은 카퍼레이드를 펼치며 화려하게 입국했다. 그런데 1982년 세계 선수권 대회가 한국에서 열렸다.

워낙 김일성 주석을 좋아하다보니 훗날 88 올림픽에까지 선수단을 보내지 않은 쿠바의 카스트로는 당연히 '남조선 괴뢰'의 서울에서 열리는 대회를 보이콧했다. 대학선발급의 미국 과 사회인야구팀이었던 일본 정도만 잡으면 우승할 수 있는 고만고만의 '세계 선수권 대회'가 안방에서 열렸으니 스포츠라면 어디나 그 대머리를 들이밀던 전두환이 가만 있을 수 없다. 이미 프로야구가 탄생한 상황이었지만 "우승시 병역 면제"와 애국심을 내세우며 국가대표급 선수들을 꼬드겼다. 김봉연, 김용희, 김일권 등은 프로팀에서 뛰고 있었지만, 김시진, 최동원,장효조, 이해창, 김재박 등은 대표팀에 남았다. 그런데 시작이 영 불안했다. 해장꺼리도 못된다고 생각했던 이탈리아에게 덥석 덜미를 잡힌 것이다. 하다못해 야구 좀 한다는 북중미 국가도 아니고 야구의 불모지인 유럽 팀에 깨지다니. 우승은커녕 망신은 면하면 다행이라는 탄식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한국에는 미래의 '국보' 선동렬이 있었다. 아직은 '무등산 폭격기'의 별명을 얻기 전, 얼굴을 뒤덮은 여드름 때문에 '멍게' (이 별명을 선동열 감독이 대단히 싫어한다는데)라고 불리웠던 고려대학교 3학년생의 이 투수는 야구 종주국 미국팀을 맞아 무려 열 다섯 개의 탈삼진을 따내며 1실점 완투승을 거둔다. 미국 선수들을 관찰하러 왔던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 사이에서는 아우성이 터져 나왔다. 쟤 누구냐? 최동원이 뜻밖으로 부진하고 또 하나의 에이스 김시진도 이탈리아전에서 보듯 죽을 쑤었던 상황에서 선동렬은 단연 돋보였다. 또 하나의 난적 대만까지 완봉으로 틀어막아 버린 것이다.

1982년 9월 14일 결승전에 해당하는 경기가 벌어졌다. 똑같이 7승 1패를 기록한 한국과 일본이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것이다. 일본 선수들은 카지노에 가서 노는 등 여유있는 모습을 보였지만 한국전 선발 투수 스즈끼는 방안에서 꼼짝 못하게 했었다고 하는데, 서른을 넘었던 노장 스즈끼는 칼같은 제구력과 기가 막힌 코너웍으로 한국 선수들을 농락한다. 한국에는 투수가 없었다. 바로 전 경기 호주전에서 15회 연장전까지 치르는 동안 투수진이 소진돼 있었던 것. 결론은 선동렬이었다. 선동렬이 초반 난조로 2점을 내줬지만 대안도 없었다. 다행히 선동렬이 페이스를 찾아가면서 팽팽한 투수전으로 전개되던 경기는 8회말 운명의 드라마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지금은 고인이 된 포수 심재원이 안타를 치고 나갔고 대타 김정수가 전진 수비를 하고 있던 중견수를 넘기는 2루타를 쳐서 1점을 따라붙는다. 그리고 조성옥의 희생번트. 1사 3루. 타선에는 김재박. 조성옥의 번트에서 보듯 어떻게든 동점부터 내고 보자는 분위기였던지라 스퀴즈가 예상됐고 당연히 일본의 구원투수도 공을 뺐다. 그런데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김재박이 마치 캥거루처럼 폴짝 뛰어 어이없이 빠지는 공을 황망하게 배트에 갖다 댄 것이다. 사인 미스였다고도 하는데 어쨌건 기적을 낳은 실수였다. 3루주자 홈인, 1루 김재박 세잎. 여기서 최고참이자 준족을 자랑하는 이해창이 중전안타를 치고 나가자 주자 1,3루. 그러나 축구 스타가 페널티킥에 약하다더니 우리의 컴퓨터 타자 장효조가 병살에 가까운 타구를 친다. 일단 홈이 급했던 일본 내야수는 일단 홈으로 던져 김재박을 아웃시키지만 주자는 1,2루에 남는다. 2사 1,2루. 이때 들어선 타자는 동국대생 한대화.

해태로 입단해 버린 홈런 타자 김봉연의 대리격으로 선발된 그는 몇 개의 공을 흘려 보낸 뒤 볼카운트 투 투에서 조금 높은 직구를 만난다. 내 기억 속에서는 그의 어깨와 나란히 할 정도로 높았던 공을 한대화는 작심한 듯 후려친다. 잠실벌의 3만 관중과 그 중계방송을 보고 있었을 최소 천만의 한국인들이 으아아 소리를 지르며 일어섰다. 좌측 좌측 좌측! 아나운서의 비명을 들으며 공의 궤적을 쫓던 카메라에 공의 행방이 나타났다. 파울과 홈런을 가르는 폴대 그것을 딱 맞추면서 외야석으로 떨어져 버린 것이다. 홈런. 한국 야구 역사상 잊혀지지 않을 3점 홈런이었다. 올림픽을 겨냥해 가동 중이던 전광판은 멋진 필체로 Homerun!을 쏟아냈고 당시 티븨를 지켜보던 부산 양정의 스포츠 머리 중학생들은 강강수월래를 하며 환호했다.

1982년 9월 14일 충청도 사나이 한 대화는 인생 최고의 순간을 맞는다. 인생 최악의 해라고 해도 무방한 (감독 해임) 올해 9월 그의 심경은 어떨지 궁금하다. 부디 그날 잠실 스타디움이 무너져라 연호하던 '한대화'의 환호를 기억하면서 참담함을 이기길 바랄 뿐.

1977.9.15 고상돈 에베레스트 위에 서다

$
0
0
산하의 오역

1977년 9월 15일 고상돈 에베레스트 위에 서다.

9월 15일은 산악의 날이다. 그 이유는 바로 이 날이 한국인이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에 그 발자국을 찍은 날이기 때문이다. 그 주인공은 고상돈이라는 산악인이다. 남한 최고봉이 있는 한라산 아래에서 자라고 은근과 끈기를 자랑하는 충청도에서 학창시절과 직장 생활을 했던 그는 1977년 9월 15일 한국 에베레스트 등반대의 제 2차 공격조로서 셸파 펨파 노르부와 함께 에베레스트 정상을 밟는다.

제주도 출신이지만 그의 어머니는 이상하게도 그가 물에 가는 것을 싫어했다고 한다. 심지어 바다에 들어갔다 온 것을 확인할 수 있도록 아들의 몸에 그림까지 그려 두었다는 것이다. 어머니에게 혼나는 것도 혼나는 거지만 잔등에 그려진 이상한 그림들을 친구들에게 뵈기 싫었던 소년 고상돈의 놀이터는 그저 학교 운동장이었다. 그때 제주도 어디에서나 뵈는, 하지만 대개 구름에 가려서 그 꼭대기는 잘 눈에 들어오지 않는 한라산은 아직은 제 운명을 모를 어린아이를 웃으며 내려다보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너는 나보다 네 배는 높은 산을 오를 운명이라”면서. 고상돈 자신도 이런 회고를 하곤 했다. “패싸움에 휘말렸다가 도망갔는데 그게 한라산 쪽이었고, 쫓아오는 이가 없어 숨을 돌리다보니 한라산 정상이 눈에 들어왔다. 거기에 오르고 싶었다.

일본을 왕래하며 사업을 하던 아버지는 아들을 교육 도시 청주로 진학시켰는데 거기서 소년 고상돈은 당당히 지역 명문 청주 중학교에 입학하여 아버지를 들뜨게 한다. 하지만 대학 진학에는 난항이 있어서 암울한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내기도 하지만 마음을 잡고서 야간대학을 진학하고 직장도 청주에서 가진다. 그리고 산악회에 가입하여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운명의 가닥을 잡는다. 하지만 그도 초반에는 어처구니없는 실수도 했다. 자일에 매달려 있던 중 하도 흡연욕구가 나서 담배를 피워 물었다가 벼락을 맞는 것이다. “이 새끼야. 그 담뱃불이 자일을 태우면 너도 죽고 네 동료들 다 죽어 이 미친 놈아.” 뺨을 맞고 쫓겨나기도 했다. 산사나이들의 세계 뿐 아니라 다 마찬가지겠지만 뭔가 일을 해 내는 사람들의 특징은 한 번 안한다고 하면 과감하게 끊어 버리는 의지다. 이 사건 이후 그는 담배를 평생 입에 대지 않는다.

한국의 유능한 알피니스트로 평가받던 그는 한국일보 장기영 사주가 적극 후원하는 한국 에베레스트 등반대의 일원이 된다. 전국 각지에서 맹훈련을 하던 중 1976년 2월 설악산 공룡능선에서 뜻밖의 사고를 만난다. 코스 훈련을 마치고 철수하던 중의 대원들을 눈사태가 덮쳐 3명의 사망자가 난 것이다. 그 가운데 경험 많기로 유명했던 최수남 훈련대장의 죽음은 뼈아팠고 그 사고 자체가 무전기 하나 제대로 구비하지 못해 일어난 사태라는 것이 마음을 아리게 했다. 생존자들이 피눈물을 흘리며 눈을 파헤치다가 기진맥진했을 때 그 앞에 나타난 것이 고상돈이었다. 그 역시 소식도 듣지 못한 채 짐이 많으니 마중 나가라는 지시를 받고 현장에 도착했던 것이었다.

에베레스트 등반대가 출발하던 날 최수남 대장의 아내가 공항에 나타난다. 산에서 남편을 잃은 아내는 세계 최고봉의 산을 오르려는 대원들에게 호소한다. “진혁이 아빠 소원을 풀어 주세요.” 그때 눈물을 훔쳤던 산사나이들은 아마도 성공하지 않고는 못배길 심경이었으리라.

현지 등반 도중 뜻밖의 행운과 만난다. 외국 등반대들이 쓰지도 않고 버리고 간 산소통 수십 개를 고스란히 손에 넣은 것이다. 에베레스트가 쓰레기로 몸살을 앓는다는 보도는 오래 전부터 나왔지만 외국 등반대의 부주의하고 무성의한 투기 행위는 한국 등반대원들에게는 고마운 은전이 됐다. 등반대장 김영도는 몇가지의 원칙을 세웠다. 첫째, 기술보다는 팀워크를 중시하며 둘째, 어떤 환경이든 적응할 수 있는 성격이라야 하며, 셋째, 히말라야 특성에 비추어 20대 전후의 젊은이를 택한다. 그리고 넷째, 선후배 의식을 제거하고 개인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한다. 다섯째, 지방산악인을 다수 기용한다. 여섯째, 정실을 배제한다. 일곱째, 현지 산행에 경험 있는 사람을 우선 선발한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너무도 당연해서 이런 것들이 ‘원칙’이라는 것이 세워지는 것이 이상하다. 하지만 2002년에도 히딩크가 “실력 위주의 선발”을 목놓아 외쳤던 것을 떠올리면 이해도 간다. 더구나 에베레스트 한국인 초등이라는 전무한 업적의 주인공을 가리는 일이 아닌가.

에베레스트 정상의 코 밑에서 1차 공격조가 정해진다. 8000미터 고도에서도 산소통을 쓰지 않고 자유로이 나다녀 셰르파들로부터도 찬탄을 받았던 강철 체력 박상열 대원과 셰르파 하나. 하지만 박상열 대원은 자기 몸을 과신했던지 8500미터 고지에서 산소통을 쓰지 않고 자다가 극심한 체력 소모를 맞게 된다. 마침내 등반대 본부에 날아든 셰르파의 무전. “배고프다 피곤하다. 산소도 없다.” 등반대장 김영도는 악을 쓴다. “둘 다 죽어! 어떻게든 내려와!” 천신만고 끝에 둘은 살아서 내려오지만 이제 산소통도 별 여유가 없었다. 뜻밖에 노획(?)한 산소통을 합쳐 28통. 이것을 메고 올라갈 2차 공격조로 고상돈 대원이 뽑힌다. 그는 이렇게 각오를 다진다. “이 도전이 실패로 돌아간다면 그건 생명의 파멸을 뜻하는 것이다. 패배란 죽음만큼 괴로운 것이다.”

2차 공격. 그리고 마침내 고상돈은 에베레스트 정상에 선다. 칼날같은 최후의 능선을 타고 오른 후 1평 남짓한 정상에 섰고 셰르파는 이곳이 정상이라고 외쳤지만 고상돈은 긴가민가했다. 하지만 그때 뭔가 발뿌리에 차인다. 트라이포드였다. 1975년 중국 등반대가 남기고 간 것이었다. 정상이 맞았다. 고상돈은 그 순간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사나이였다. 셰르파와 알피니스트로서가 아닌 남자대 남자의 친구로 함께 에베레스트에 오른 셰르파 펨바 노르부는 짐승같이 울부짖으며 서로 끌어안았고 함께 둘에게 관대했던 에베레스트의 신에게 기도를 올렸다. 그리고 고상돈은 설악산에서 죽어간 에베레스트 등반대원 3인의 사진을 만년설 속에 묻는다. 사진 속에서나마 고인들도 환하게 웃으며 축하했으리라.
  
그 영광으로부터 2년이 지나지 않아 고상돈은 고인이 된다. 북미의 험한 산 매킨리를 등정하고 내려오다가 그만 추락, 사망하고 만 것이다. 이때 그의 죽음의 배경으로 들어지는 것이 한국인 산악인들끼리의 경쟁이다. 그 시즌에만 고령 산악회와 고려대학교 산악회가 고상돈의 한국일보 산악회와 함께 매킨리에 몰리고 있었던 것이다. 산을 오르는 것은 누구와의 경쟁이 아닌 자신과의 싸움이라지만 ‘1등 이외에는 기억해 주지 않는’ 천박한 사회의 악령은 그때도 그 그림자를 들이밀고 있었다. 또 하나의 위대한 한국인 등반가 박영석 역시 등산장비회사와 언론사의 마케팅 경쟁 속에 희생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되는 것도 그런 맥락일 것이다.

짧게 세상에 왔다가 세계 최고의 사나이가 된 뒤 무엇이 그리 급했는지 가버린 사나이. 고상돈이 1977년 9월 15일 에베레스트 정상에 섰다.

 


tag :

1973.9.16 끝나지 않은 노래

$
0
0
산하의 오역

1973년 9월 16일 끝나지 않은 노래

1973년 9월 11일은 또 하나의 끔찍한 9.11이었다. 세계 최초로 선거를 통해 정권을 잡은 사회주의자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에 대항하여 칠레의 군부가 쿠데타의 방아쇠를 당긴 것이다. 여러 번의 '자본가 파업'을 통해 아옌데의 뒷덜미를 잡아챘던 보수 세력과 혹여 제2의 카스트로가 남미의 대국 ABC. (아르헨티나 브라질 칠레) 가운데 하나인 칠레를 장악할까봐 노심...
초사하던 미국은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항복을 거부하는 아옌데의 대통령궁을 향하여 쿠데타군은 공군의 폭격을 퍼붓는다. 한때 그들이 마지못해나마 충성을 맹세했던 대통령에게 그들은 한치의 예우도 인정도 드러내지 않았다. 아옌데는 자신과 운명을 같이하겠다는 경호원들을 설득해 내...보내지만 그 자신은 기관단총을 들고 최후까지 저항하다가 머리에 총을 맞고 쓰러진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사냥을 당하듯 죽음을 당하는 판이었으니 나라 분위기가 어쨌을지는 가히 짐작이 간다. 좌파 사냥 빨갱이 사냥의 허리케인이 초특급 규모로 그 길쭉한 칠레의 영토를 남북으로 휩쓸었다. 그 와중에 지방에서 공연을 준비 중이던 한 예술가다 잡혀 온다. 쿠데타 소식을 듣고 주먹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분노한 그의 이름은 빅토르 하라.

1932년 소작민의 아들로 태어난 하라는 한때 산티아고 대학에서 연출을 공부하기도 했지만 그의 무대는 좁고 어두컴컴한 극장이 아니었다. 인디언의 혈통을 이어받은 어머니로부터 전통 민요의 세계를 발견하여 칠레를 관통하는 안데스 산맥 곳곳을 쏘다니며 민요를 채집했던 그는 특권층과 지주 집단의 횡포에 허덕이던 칠레 민중을 다독이고, 위로하고 때로는 격동시키는 노래와 연극을 만들어낸 문화 전사였다. 그에게 “기타는 총, 노래는 총알”이라는 슬로건의 누에보 깐시온 (새 노래) 운동의 창시자였던 비올레따 빠라와의 만남은 날개를 단 격이었다. 그의 기타는 자동소총보다 더 고성능의 무기였고 그 육성은 어떤 포성보다도 더 크게 세상을 울렸다.

그의 노래 <선언>의 가사는 이렇다.

“내가 노래하는 건
노래를 좋아하거나 좋은 목소리를 갖고 있어서가 아니지
기타도 감정과 이성을 갖고 있기에 노래하게 되는 것이다.
내 기타는 대지의 심장과 비둘기의 날개를 갖고
기쁨과 슬픔을 축복하는 성수(聖水)와 같아 내 노래는 고귀해지네
비올레따의 말처럼 나는 목표를 찾았다.
노동하는 기타, 봄의 내음나는 기타
내 기타는 돈 많은 자들의 기타도 아니고 그것과는 하나도 닮지 않았지
내 노래는 사다리. 저 별에 닿는 사다리.
노래하며 죽기로 한 남자.
진실한 노래를 부르며 죽는 남자의 핏줄 속에 고동치는 노래는 그만한 의미가 있다.

나의 노래는 덧없는 게 아니다. 나의 노래는 이 좁다란 나라를 위한 것
땅 속 깊이까지 이 나라를 위한 것
만물이 여기 잠들고 모든 것이 시작되는 이곳에서
그동안 용감했던 그 노래는 영원히 새롭게 태어나리라.

의미를 지닌 노래는 핏줄 속으로 흐른다는 그의 노래처럼, 그의 노래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칠레 민중들의 가슴에서 가슴으로 흘렀다. 1970년 선거에서 그는 살바도르 아옌데가 이끄는 인민연합의 승리를 위해 기타를 든 문화 전사로 나섰고 특권층의 부패와 학정, 그리고 칠레 사회를 짓누르던 사회적 모순을 폭로하고 그들을 통렬하게 비웃는 노래들을 만들었고, 인민들의 단결과 승리를 호소하는 노래를 지어 온 칠레에 물결치게 했다. 그 대표적인 곡이 유명한 벤세레모스다.

조국의 깊은 시련으로부터 민중의 외침이 일어나네.
이미 새로운 여명이 밝아와 모든 칠레가 노래 부르기 시작하네
불멸하는 모범을 보여준 한 용맹한 군인을 기억하며
우리는 죽음에 맞서 결코 조국을 저버리지 않으리.
우리는 승리하리라,
우리는 승리하리라.
많은 사슬은 끊어지고, 우리는 승리하리라, 우리는 승리하리라.
우리는 비극을 이겨내리라.
농부들, 군인들, 광부들 그리고 이 땅의 모든 여성과 학생, 노동자들이여.
우리는 반드시 이룩할 것이다. 영광의 땅에 씨를 뿌리자. 사회주의의 미래가 열린다.
모두 함께 역사를 만들어 가자. 이룩하자, 이룩하자, 이룩하자.

마침내 1970년 대통령 선거에서 아옌데가 당선되지만 앞서 말한 대로 그는 칠레의 우익들에게 부자들에게 지주들에게 그리고 결정적으로 미국에게 찍어내야 할 곁가지였다. 그들은 경제를 마비시켰고 혼란을 조장하면서 아옌데 정권을 위협했으며 미국은 칠레의 밥줄이라 할 국제 구리 가격에 장난을 치면서 칠레의 목을 죄었다. 아옌데는 국민들의 재신임 투표를 통해 이 위기를 돌파하고자 하지만 피노체트는 바로 그 투표일로 예정되어 있던 9월 11일을 D데이로 삼아 쿠데타를 일으켰다. 아옌데가 죽은 뒤 각지에서 끌려온 반쿠데타 인사들, 좌익들은 한 체육관에 짐승들처럼 수용됐다. “이 빨갱이 새끼들 너희들은 다 죽은 목숨이다.”는 폭언과 함께 무수한 발길질과 구타가 7년 뒤 지구 반대편의 나라 서남쪽의 한 도시에서처럼 난무했으리라. 죽음의 공포가 체육관을 뿌연 안개처럼 뒤덮을 즈음, 한 사람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벤세레모스>였다. 그리고 그 주인공은 빅토르 하라였다.

군인들은 당연히 짐승같은 폭력을 휘둘렀지만 짙은 신음 사이에서도 노래는 끊어지지 않았다. 가느다랗지만 창날처럼 곧게 펴진 그의 노래는 수만 갈래로 갈라져 체육관에 처박힌 채 눈만 굴리고 있던 겁많은 영장류들의 존엄을 회복시켰다. 벤세레모스 벤세레모스.... 우리 승리하리라 우리 승리하리라..... 독창은 합창으로 번졌고 그 합창은 어떤 무력보다도 위대한 인간의 자유에 대한 송가로서 체육관을 메아리치게 된다. 그리고 하라는 그에 걸맞는 복수를 당한다.
 
무자비한 구타는 기본으로 하고 끝내 용서가 없는 총알에 몸이 뚫린 것은 물론, 그의 시신을 본 아내는 기가 막힌 사실을 하나 발견한다. 그의 손이 모두 부러져 있었던 것이다. 코드를 짚건 그의 손, 여섯 개의 줄을 힘차게 튕기던 그의 손이 얼마나 미웠으면, 얼마나 지긋지긋했으면 군인들은 죽이기 전에 그 손을 못 쓰게 만들었던 것일까. 그건 군인들에게는 일종의 ‘무장해제’의 절차였는지도 모른다. 기타는 그의 무기고 노래는 그의 총알이었기에. 부활하더라도 그 무기를 쓰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빅토르 하라는 그렇게 1973년 9월 16일 죽었다.



tag :

박근혜 후보에게 보내는 충고

$
0
0
 
박근혜 후보에게 보내는 충고

전제부터 시작하자. 박근혜 후보는 아버지의 행동에 대해 사과해야 할 의무가 없다. 아버지는 아버지이고, 딸은 딸이다. 이것은 연좌율이 횡행하던 시대를 깨고 나온 근대적 법 의식의 소중한 소산이며 흔들리지 말아야 할 가치다. 아버지가 친일 헌병이든 중추원 의장이든 그 때문에 아들이나 딸이 공직에서 물러나야 할 의무는 없다. 동시에 아버지가 연쇄살인마이든 어린이 성추행범이든 그 아들이 아버지...
의 행동에 대해 책임지고 죄값을 치러야 할 까닭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박근혜 후보가 자연인 박근혜가 아니라 민주 공화국의 대통령 후보로 자리매김한 이상 박근혜 후보에게는 공화국의 역사에 대한 인식을 토로하고 검증받아야 할 책임이 생긴다. 즉 18년 동안 대한민국을 통치했던 아버지의 시대의 ‘공과’에 대해 객관적으로 거리를 두고 평가해야 한다는 뜻이다. 공과(功過)의 공과 과란 원래 물과 기름 같은 것이다. 즉 공은 공대로 과는 과대로 따로이 평가하고 그 속에서 역사적 교훈을 창출해야 하는 것이지 그를 뭉뚱그려 과보다 공이 크다느니 공보다 과가 크다느니 입씨름하는 것은 물과 기름을 억지로 뒤섞어 물에 가깝니 기름에 가깝니 하여 물과 기름 양쪽을 다 못쓰게 하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

여기서 고 박정희 대통령의 ‘공과’에 대해 따질 생각은 없다. 단지 대한민국의 현재 여당의 대통령 후보인 박근혜 후보가 전임 대통령의 행적을 평가하는 자세에 대해 얘기하고 싶을 뿐이다. 전임 대통령 박정희가 저지른 가운데 가장 큰 ‘과’(過) 중의 하나는 바로 인혁당 관련자들에 대한 사법 살인일 것이다. 체포된 후 변호인들과 가족의 접견조차 차단당한 채 무지막지한 고문에 시달려야 했고 사형 선고를 받은 다음날 새벽 바로 목이 매달렸다가 가족의 입회도 없이 불구덩이에 들어가야 했던 사람들의 원혼은 지금도 광화문 이순신 동상 위를 맴돌고 있을 터이다.

그 가족들에게 박정희 대통령은 불구대천의 원수다. 한 하늘을 같이 이고 살 수 없는 원수라는 뜻이다. 더구나 “대한민국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지니며 국가는 이를 위하여 국민의 기본적 인권을 최대한 보장할 권리를 진다.”(유신헌법 8조)고 못 박은 헌법이 엄존하는 공화국에서 그렇게 야만적으로 사람 목숨들을 앗아가 버린 행위는 그 가족들로서는 숨을 멈출 때까지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다. 어느 정신 나간 신문사 논설위원이 저승에서 박정희와 인혁당 희생자들이 막걸리를 먹으며 조국을 얘기하고 있을 것이라고 얘기했지만 저승에서는 말이 될지 몰라도 이승에서는 그것은 막걸리지 말이 아니다.

박근혜 후보는 이들을 끌어안고자 한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불가피한 일이었다거나 대법원 판결이 두 개가 있다거나 생뚱맞은 반응을 보였으나 그로 인해 된서리를 맞은 탓인지 새로이 역사 공부를 한 때문인지 5.16과 ‘민혁당’ 사건이 ‘헌법 가치를 훼손한 사건’이라고 표현하고 인혁당 관련자 가족들을 만나 사과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하지만 사과라는 것은 원래 하는 사람보다 받는 사람의 마음이 중요한 법이다. 이미 상처난 사람들의 가족을 후벼 팔 대로 후벼 파고 소금도 찰지게 뿌린 뒤에야 나의 진심은 그것이 아니었다거나 전임대통령이자 아버지의 행동에 대해 유감을 표한다면 어찌 그 사과가 사람의 마음을 녹일 수 있으랴.

나는 여기에서 박근혜 후보에게 하나의 아이디어를 제공하고자 한다. ‘헌법적 가치’를 훼손했던 인혁당 사건에 대한 자신의 진심을 드러내고 또 지금도 치를 떨고 살아가는 그 가족들의 마음을 풀어줄 열쇠를 드리고자 한다. 이것만 실행에 옮긴다면 박근혜 후보는 자신의 공화국 대통령 후보로서의 개인적 가치는 물론 역사적 인식면에서도 하자 없음을 공인받게 될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 박정희 대통령은 인혁당 관련자들에게 ‘불구대천’의 원수이지만 박근혜 대표 또한 ‘불구대천’의 원수를 지니고 있다. 바로 박정희 대통령에게 총을 쏘았던 전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와 그 부하들이다. 부모를 죽인 원수를 어찌 용서할 수 있으랴...... 하지만 박근혜 후보는 그들을 용서하고 끌어 안아야 한다.


“캄보디아에서는 수백만 명이 죽었는데 우리도 좀 죽인다고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경호실장과 “안되면 내가 발포명령을 내리겠다.”는 절대권력자 앞에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당긴 방아쇠는 당시 계엄령 하에서도 시위를 벌이던 부산과 마산의 시민들의 목숨 뿐 아니라, 박정희 대통령의 마지막 명예룰 지켰다고 볼 수도 있다. 만약 부마항쟁 때 박정희가 발포령을 내렸다면 그는 카다피 이상으로 비참하게 죽었을지도 모른다. “딸 가진 아버지로서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어쩔 수 없이 해야 했던, 즉 박정희 대통령이 찍은 여자들을 그 앞에 대령하는 것을 일삼아 했던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박선호, 청렴하기 이를데 없었으며 군 동기들과 후배들의 존경을 받았던 박흥주 대령이 대통령 살해에 가담했던 것은 그들로서도 참을 수 없는 유신의 무거움 때문이었다.

하지만 또 한 번 이해한다. 그들은 박근혜 후보에게는 아버지를 죽인 원수다. 부모를 죽인 원수와 어찌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있으랴. 불구대천. 그들을 용서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요구한다. 그들을 용서하라. 그리고 그들의 명예를 회복시키라. 죽는 자리에까지 가수와 여대생을 좌우에 불러앉혔던 그 엽색행각을 권력을 통해 자행하고 사람 목숨 수십만을 제 권력의 깔개 이상으로 보지 않는 듯 행동하던 전임 대통령을 그 시점에서만큼은 비판하라. 별 조직적 연계도 없이, 권력에 대한 구체적인 의지도 없이 일단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고 봤던 그 성급한 사내들을 용서하고 끌어안으라. 그 정도의 진정성은 보여야 인혁당 가족들 앞에 나아갈 수 있지 않겠는가. 최소한 1979년 10월 26일의 박정희는 이성을 상실한 독재자였으며, 그 독재를 끝장낸 것이 차라리 오늘의 나를 있게 한 것이라고 얘기할 수 있다면, 개인적으로는 불구대천의 원수이지만 그들의 행동이 불의하다고만은 할 수 없다고 담담하게 말할 수 있다면, 그 이상의 진정성이 무엇이 있겠는가.

박근혜 후보가 입버릇처럼 말하는 국민통합을 위해서는 인혁당 관련자 가족들에게 공없는 사과 메시지만 날릴 것이 아니라, 스스로 불구대천의 원수를 용서하고 그들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줄 아는 깜냥을 보여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국민통합이란 땡중의 도로아미타불 이상일 수 없고 제 새끼에게 교회 세습한 목사의 아멘 소리와도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만약 박근혜 후보가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묘소에 가서 그 묘비를 쓰다듬으며 “아버지도 당신도 우리나라의 역사를 위해 불가피한 사람이었습니다.” 라는 정도로만 말하며 울먹인다면, 수십년 간 ‘국가원수 시해’의 역천(逆天)의 혐의 하에서 좌도 우도 진보도 보수도 외면해 온 그들을 끌어안는다면 나는 그제야 인혁당 관련자들에 대한 사과를 믿을 수 있을 것이고 그제야 박근혜 후보의 ‘정책’을 눈여겨 볼 것이다.

그래도 부모를 죽인 원수인데 그러겠느냐고? 그렇다면 무슨 염치로 인혁당 관련자들에게 머리를 조아릴 것인가. 자신의 남편과 아버지를 파리 잡듯 죽여버린 자의 딸이,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고 대법원 판결은 두 개 아닌가.”라고 감히 말하던 그 딸이 느닷없이 내미는 화해의 손길에 무슨 진정성이 담길 수 있단 말인가.


박근혜 후보의 성찰을 요구한다. 당신은 아버지 때문에 이 자리까지 왔지만 아버지 말대로 그 무덤에 침을 뱉지 못하면 그 이상을 나아갈 수 없다. 그의 딸이기 때문이 아니라 이 나라 대통령 후보이기 때문이다


tag :

안철수 후보에 대한 발끈함을 거두며

$
0
0

아 다르고 어 다른 것이 말이라고 한다. 그만큼 말을 조심해야 하고 듣는 사람을 배려해야 한다는 뜻을 간직한 ‘말’이다. 그런데 이 ‘아’다르고 ‘어’ 다르게 만드는 현상은 대개 누군가의 입에서 직접 나왔을 때보다는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옮겨질 때 더 복잡하고 심각하게 벌어진다. 특히나 그 매개체가 ‘언론’이라면 더욱 그렇다. 대개 사람에게는 보고 싶은 것만 보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게 마련이지만 언론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보고 싶은 것을 보이게 하고 듣고 싶은 것을 들리게 하는 능력까지도 보유한 경우가 많은 것이다.


 언론은 원하는 답을 듣기 위해 다양한 질문을 다각도로 전개하게 마련이고, 거기서 나온 대답은 언론에 의해 주관적으로 해석되게 마련이다. 물론 그 와중에 중요한 것은 ‘팩트’다 그 뉘앙스와 맥락과 전후사정을 감안한 팩트면 좋을 것이고 언론 종사자들이 그러한 합리적인 팩트를 추구하리라 믿지만 사실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음을 우리는 안다.


 어제 나는 얼치기 시저가 된 것 같다. 시저도 아닌 주제에 브루투스 너마저도를 부르짖었던 것은 그렇다고 치는데, 사실 브루투스 이름 박힌 칼이라는 이유로 브루투수 얼굴도 확인하지 않고 브루투스 You too!를 외치며 얼굴을 토가로 휘감아 버린 얼치기 시저 말이다. “안철수 무소속 대선후보는 자신이 언급한 단일화 조건을 새누리당이 만족할 경우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와도 단일화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에 "국민들이 동의하느냐가 문제"라고 답했다.”는 기사가 바로 브루투스의 이름이 박힌 칼이었다. 아니 안철수의 이름이 박힌 칼이었다고나 할까.


 “국민의 뜻”이라는 애매한 갑옷 속에 항차 새누리당과의 단일화의 가능성을 언급했다는 자체가 지금 “나랑 싸우자는 거냐”는 식의 발끈함의 원천이었고 “병 걸린 거 아냐?” 하는 식의 거친 언사의 이유가 됐고 그렇게 “안철수 유 투!”를 내갈겼던 것이다. 하지만 근데 자고 일어나 생각해 보니 좀 어색한 구석이 있다. 우선 저 말이 어떤 분위기에서, 무슨 맥락에서,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어떤 뉘앙스로 말했느냐에 대한 입체적 분석 없이 그저 ‘새누리당과의 단일화’와 ‘국민들의 동의’의 물리적 결합으로만 바라보지 않았던가 싶은 것이다. 거두절미 전후소거하고 “어쨌건 네가 이 말을 했잖아?”라고 윽박지르는 건 사실 조선일보 류의 전매특허가 아니었던가. “국민들이 동의하느냐가 문제”라는 말이 “국민들이 동의나 해 주시겠습니까?”라는 하늘과 “국민들이 동의하면 할 수도 있죠.”라는 땅으로 그 해석이 왔다갔다 할 수도 있을진대, 나의 발끈함은 어느 허공을 맴돌아야 한단 말인가.


 머쓱함 그리고 송구함으로 일단 섣불렀던 발끈함을 거둔다. 하지만 하고픈 말은 있다. 이른바 “문묘안묘론” 즉 문이든 안이든 저쪽을 잘 잡는 고양이가 좋은 고양이다라는 말을 쓴웃음으로 공감하면서 그 두 고양이 사이에서 나는 1퍼센트 정도 안씨 고양이로 기울어 있었다. 하지만 쥐를 잘 잡는 고양이가 되려면 아직도 안씨 고양이가 갖춰야 할 것이 많은 것 같다. 균형 잃고 비틀거리는 수염 잘린 고양이라면 쥐를 잘 잡을 리 없을 것이고 언제 발톱을 내고 뺄 줄 모르는 고양이라면 저 고양이가 대체 무슨 쥐를 잡을 것인지 의아한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나의 발끈함과 많은 사람들의 오해는 그런 측면에 기댄 것도 있으리라. 잘 하길 바란다. 함정은 곳곳에 파여 있고 지뢰는 길목마다 놓여 있을 것이다. 가끔은 쥐약도 놓여 있을 것이고 덫도 설치돼 있을 것이다. 그를 피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길은 명확함일 것 같다. 말이든 정책이든 피와 아의 구분이든.



tag :

1981.10.4 은하철도 999 첫방송

$
0
0
산하의 오역 

1981년 10월 4일 은하철도 999 첫방송 

<긴급출동 SOS 24> 를 처음 방송할 때 일입니다. 여자 성우는 대충 결정이 됐는데 남자 성우는 누구다 아니다 의견이 분분했어요. 한 명의 입에서 김기현 성우의 이름이 나왔고 저는 그때부터 무조건 김기현!으로 밀어부칩니다. 그 나직하면서도 파워 있는 목소리가 우리가 하는 프로그램같은 하드보일드에 어울린다는 이유였지요. 하지만 그것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분을 한 번 실물로 뵙고 인사드리고 싶었거든요. 그 이유는 그분이 바로 <은하철도 999>의 차장이었기 때문입니다. 철이만한 키에 얼굴 없이 동그란 빛 두 개로 눈을 대신한 채 "철이씨 철이씨! 어서 타요!"를 부르짖던 그 차장의 목소리가 바로 김기현씨였거든요. 그분을 처음 만나 인사하는데 그 말씀을 드리니 허허 웃으시면서 철이씨 철이씨를 한 번 리바이벌해 주시는데 나이 30대 후반의 PD는 그냥 동심의 세계로 돌아갔습니다. 

우리 아버지 세대가 안정효의 소설 제목대로 '헐리우드 키드 세대'라면 우리 세대는 재패니메이션 세대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마린보이, 이겨라 승리호 날아라 태극호로 동심을 키우고 마징가 제트와 그레이트 마징가와 그렌다이저로 우주에 대한 로망을 배우고 미래소년 코난에서 산업사회의 어두운 면을 배우고 요술공주 밍키에서 여자 벗은 몸을 훔쳐 봤던 세대 아니겠습니까. 그 가운데 <은하철도 999>는 그 가운데에서도 굵은 발자취를 남긴 프로그램이었습니다. 그 첫방송이 1981년 10월 4일 MBC 를 통해 이뤄집니다. 방송 시간은 일요일 여덟시. 원래 일요일만큼은 늘어지게 늦잠을 자던 꼬마들이 벌떡 일어나 TV가 있는 안방으로 기어들어 부모들의 일요일 아침잠을 들부수게 했고 아홉시 주일학교 예배 참석자가 급감하여 전도사님들을 걱정케 했던 <은하철도 999>가 시작된 겁니다. 

사실 이 애니메이션은 무척이나 심오하고 어른들도 진중히 들여다보아야 이해될 메시지를 깔고 있었습니다. '영원한 생명' 개념도 그렇고 은하철도 999가 머무는 별마다 마주치는 사람들과 그 사연들은 어린아이들로서는 사실 정확히 이해하기 힘든 스토리도 많았죠. 하지만 러시아 모자에 무릎까지 내려오는 금발을 한 메텔에 혹해서, 또 끊일 듯 끊이지 않고 무한궤도를 달려가는 은하철도 999의 기적 소리에 중독되어 꼬마들은 TV 앞을 사수했었지요. 그리고 김국환씨가 부른 주제가는 또 얼마나 멋있었는지. 

대학 때 "버스가 횡단보도 지나서 고대 앞에 닿으면 술 취한 고대생이 버스에 올라타네 자리뺏긴 할머니의 눈동자는 불타오르고 자리 뺏긴 운전사의 가슴엔 야마가 솟아오르네. 힘차게 달려라 시내버스 333 시내버스 333"이라고 깔깔대고 노래해던 노가바는 바로 <은하철도 999>의 주제가였지요. 그런데 이 주제가는 기실 90퍼센트 일본 것과 유사합니다. 옛 딴지일보 기사에 따르면 원래 방송 초반 주제가는 이 일본판이 아닌 독창적인 가사와 멜로디를 지닌 노래였다고 합니다. 그 이후에도 본편 중간 중간에 삽입되어 어린 마음을 뭉클하게 했던 노래지요. 나는 이 노래를 부르고 들을 때마다 눈물이 핑핑 원을 그렸어요. 



외로운 기적소리에 눈물마저 메마르고
찬바람에 별빛마저 흐느끼네
엄마 사랑찾는 그리움에
무정한 기차는 무정한 기차는 흐느껴 우네
말좀해다오 은하철도야 내 갈곳이 어디냐
말좀해다오 은하철도야 은하철도야






"말 좀 해 다오 은하철도야 내 갈 곳이 어디냐" 울부짖듯 하는 가사에 무한궤도를 달리는 은하철도들의 그림이 얹어졌는데 어른들이 동네 평상에서 술 먹고 부르던 "타향살이 몇 해더냐 목 메어 불러 봐도"나 "천리타향 낯선 거리 외로운 발길....."의 정서가 이해될만큼 가슴이 찡해 오고 인생이란 무엇인가 우주란 얼마나 넓은가 철학적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런데 원작을 제작했던 일본인들도 감탄했다는 이 주제가는 밀려나고 맙니다. 원인은 MBC였죠. MBC는 이 노래가 어린이들의 정서에 맞지 않는다고 판단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좀 쾌활한 느낌의 원 주제곡의 표절곡이 5회 이후 은하철도 999의 주제가로 정해집니다. 정작 떨궈 놓고 보니 아까왔던지 MBC는 이 노래를 자주 자주 프로그램 중반에 삽입하고 저처럼 예민한(?) 꼬마들의 정서를 자극했었죠. 


'엄마 잃은 소년'을 엄마처럼 또는 연인처럼 감싸던 메텔에 대해서 이성적 연민을 품었던 건 아마 저 뿐이 아니었을 겁니다. 메텔이 그 검은 옷을 벗고 거의 나신을 드러낸 회차가 방송된 다음 날 온통 메텔 얘기로 그득했던 학교 분위기가 기억에 새롭습니다. 철이가 추구했던 영원한 생명이 결국은 기계인간이 되는 것이었고 메텔의 어머니는 이런 철이를 죽이려 하지만 딸 메텔은 탈옥을 감행하면서까지 철이를 도왔고 메텔의 어머니는 철이에 의해 용광로에 떨어지죠. 그리고 마지막으로 프로메슘을 떠나기 직전 메텔은 철이에게 갑작스런 키스를 감행합니다. 그때 철이의 옥떨메같은 얼굴은 온통 시뻘겋게 달아오르죠. 아마 그때 그 만화를 봤던 수백만의 소년들 역시 철이가 되었을 겁니다. 하지만 메텔은 철이와 같은 은하철도 999를 타지 않고 다른 열차에 올라타서 다른 소년과의 여행을 선택하는데 이를 알아차린 철이는 메텔을 부르며 울부짖습니다. 메텔 메텔 메텔. 아 그때 첫사랑을 잃은 것은 철이만이 아니었습니다. 

연휴 때마다 방송된 특별판(극장판인지도 모르겠는데) 은하철도 999 가운데 '화석화개스구름'이라는 것이 등장하는 편이 있습니다. 어떤 별에 전 생명체를 석고조각으로 만들어버리는 화석화개스구름이 덮치는데 그때 그 별을 관측하던 우주비행사였던 한 남자만이 화석화를 면합니다. 그에게는 예쁜 연인이 있었는데 그녀는 그야말로 우주의 비너스같은 미인 석고 조각처럼 굳어지죠. 그때 우주의 해적들은 이 아름다운 화석(?)을 빼돌리려 하고 남자는 칼을 휘두르며 (여기서 일본 냄새가 팍팍 나긴 하지만) 그에 맞섭니다. 하지만 그 와중에 깊은 상처를 입는데 때마침 또 화석화개스구름이 다가오죠. 예의 차장이 "철이씨 빨리!"를 부르짖는 가운데 철이는 가까스로 은하철도에 올라타지만 남자는 한때 연인이었던 화석 옆에 누워 손을 잡고 화석화개스구름을 기쁘게 기다립니다. 둘은 그렇게 영원히 화석으로 그 별에 남게 되었죠. 그 두 남녀가 나란히 누워 있던 모습 또한 선명히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아 그리고 흐르는 노래 "외로운 기적 소리에 눈물마저 메마르고......." 

초등학교 6학년 때 시작해서 중학교 2학년 때 쫑났던 기나긴 애니메이션. 푸르른 동심이 풋사과같은 사춘기 감성으로 전화되던 시기에 함께 했던 은하철도 999. 이 글을 읽으면서 맞아 맞아 고개 끄덕이는 분들 꽤 되실 겁니다. 힘차게 달려라 은하철도 999 힘차게 달려라 은하철도 999가 1981년 10월 4일 MBC에서 첫 방송됐습니다.




tag :

1926.10.5 성동원두 경성운동장

$
0
0
산하의 오역 

1925년 10월 5일 성동원두 경성운동장 

내 생일은 ·1925년 10월 5일이라오. 묻지마라 갑자생을 면한 을축년생이지. 이 해 조선에서는 무지막지한 대홍수가 있었소. 요즘도 홍수가 질 때 가끔 기상 캐스터들이 얘기하는 ‘을축년 대홍수’가 그것이지. 이때 노량진이나 용산등 한강변은 물론이고 남대문까지 물이 들어찼다고 하니 얼마나 큰 홍수였는지 짐작해 보시오 옛날 백제의 유적지라는 몽촌토성과 풍납
토성 흔적도 이 홍수 뒤에 드러났다오. 근 2천년간 그 위를 덮고 있던 흙을 홍수가 싸악 흘러 내려 갔던 거 아니겠소. 

아무튼 그 홍수가 있던 해 나는 태어났소 내 태어날 때 아명은 ‘동궁전하어성혼기념경성운동장’이었소. 이때 동궁전하는 당시 일본 황태자이자 미친 아버지를 대신해 섭정하던 히로히토였지. 이 양반 테니스를 즐겨 치는 등 운동을 꽤 좋아했는데 “운동을 좋아하시는 전하의 기념사업으로 운동장을 세우는 것이 적절”하다는 것이 일제 당국의 입장이었소. 당시 사대문 안에야 나같이 우람한 운동장을 세울 데가 없었을 것이고, 일제는 동대문 밖 옛 훈련원터를 주목하게 됐지. 병사들 훈련시키던 곳이니 널찍하고 바로 동대문 밖이니 오가기도 좋고. 동대문 밖 너른 들판이 시작되던 곳 ‘성동원두’라는 별명이 내게 붙었소. 아마 나이 쉰줄쯤 된 이들은 기억하리다. “안녕하십니까 여기는 성동원두 서울운동장입니다.” 내가 젊었을 때는 그게 성동원두 경성운동장이었지. 



원래 내 자리에는 옛 한양 성벽이 버티고 있었지만 일본 사람들이 그런 거 신경이나 쓰나. 싹 헐어버리고 그 위에 나를 세웠소. 그래서 축구장 테니스장 수영장 등 각종 스포츠 시설이 망라된 ‘경성운동장’이 1925년 10월 5일 (15일이라는 사람도 있더군. 나도 몰라 가물가물해서) 개장하오, 출생신고 (정식준공)는 다음 해에 하지만. 그 이후 정말로 많은 이들이 내 안에서 활약하고 환호하고 눈물 흘리고 사라져 갔다오. 기억나는 것 몇 가지만 얘기하리다. 

내가 세워진 뒤 나는 한국 스포츠의 메카가 된다오. 다른 건 몰라도 스포츠는 조선 사람들이 일본 사람들보다 잘했던 것 같소. 또 “싸나이거든 풋볼을 차라.”는 등 ‘문약’으로 망한 나라를 스포츠를 통해 강인한 체질로 바꿔 보자는 식의 캠페인도 많았던지 사람들이 대단한 관심을 보였지. 내가 태어난 초기에 있었던 경평전부터 얘기를 시작해 봅시다. 조선 사람들은 축구를 참 좋아했는데 각 도시마다 자존심을 걸고 대회를 치를 정도였소. 그 가운데 최강의 두 팀이라면 역시 경성팀과 평양팀이었소. 경성팀이 서울내기처럼 화려한 개인기 위주의 경기를 했다면 평양팀은 '평양박치기‘의 위용처럼 강력한 투지와 몸싸움으로 유명했소. 1회 경평전은 휘문고보 운동장이었지만 2회 때부터는 내 안에서 펼쳐지지. 하지만 일제는 조선인들이 수천 명 몰려들어 와와 거리는 것이 무척 거슬렸나 봐. 경평전 자체를 금지시켜 버리니까. 하지만 경평전은 우여곡절 끝에 재개됐고 1935년에는 또 다시 나 경성운동장에서 6회 경평전이 열리는데 나는 그만 차마 못볼 꼴을 보고 말지. 

판정 시비 끝에 다혈질인 서북 관중들과 시골뜨기 무시하기로는 예나 지금이나 매한가지인 서울 응원단이 대판 붙어버린 거요. 원래 스포츠 경기에서는 소요가 많았소. 내가 지어지기 전 활약했던 자전거 선수 엄복동이 편파판정을 항의하다가 두들겨 맞자 전 관중이 들고 일어섰던 일은 일제의 기억에 선연히 남아 있었지. 하지만 조선말 쓰는 관중들이 두 패로 갈라져서 간나 새끼 개새끼 하면서 치고 받는 거 매우 볼썽이 사납습디다. 

언젠가는 몽양 여운형이 앞장서고 수천의 관중이 운집한 적이 있었소. 나는 저 거물까지 등장해서 환영대회를 한다니 누가 오나 했는데 그건 권투선수 서정권이었지. 도입된 지 얼마 안되는 권투 선수로서 일본 선수들 숱하게 때려눕혀 식민지 조선 사람들을 열광시켰던 그는 미국으로 건너간 뒤 세계랭킹 6위까지 올랐던 사람이오. 그가 돌아온다니 여운형까지 나서서 환영 연설을 했고 서정권은 보란 듯이 라슈 조라는 선수를 흠씬 두들겨 패서 TKO로 이기지. 조선 사람들 참 좋아하더군. 열등감에 시달리던 조선 사람들로서는 그만한 구경거리가 없었겠지. 

해방 뒤 처음으로 열린 1945년 10월 27일의 전국 체전도 내 몫이었소. ‘서울운동장’으로 개명된 나는 한 사람의 눈물을 보면서 참 마음이 짠했었지. 그건 손기정이었소. 손기정은 태극기 기수였는데 그는 태극기를 든 채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을 흘렸소. 머리 스타일도 9년 전 베를린 올림픽에서 일장기를 달고 우승했을 때의 바로 그 헤어스타일로 머리를 들지 못하고 울었지. 이제 내 머리에는 일장기 아닌 태극기가 걸려졌었고 그때는 평양에서 온 이들이건 함흥에서 온 이들이건 모두 그 태극기 앞에 경례를 했었지. 아마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의 가슴은 새로운 희망과 기쁨으로 터져 나갔을 거요. 물론 몇년 내로 삼팔선 이북의 사람들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하게 됐고 5년 뒤 전쟁이 터지리라고는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겠지만. 

나는 이후 한국에서 벌어진 주요 스포츠 경기의 대부분을 지켜 봤소. 차범근이 7분 동안 세 골을 넣는 것도 봤고 수십 년간 월드컵 예선에서 피눈물을 흘리던 것도 참 가슴 아프게 봤소. 또 고교야구를 수십 년 동안 보면서 그 초롱초롱한 이름과 얼굴들을 생생히 봤다오. 역전의 명수 군산상고의 기막힌 모습도 봤고 고교생이었지만 슈퍼스타급이었던 박노준이 치명적인 부상을 당하는 모습도 봤지. 프로야구도 프로축구도 나 내가 그 개막전을 치렀고 고대와 연대가 벌이는 정기전도 거의 내몫이었지요. 어디 스포츠 뿐이겠소. 해방 공간에서 치르던 광복절 기념식이나 3.1절 기념식이나 다 내가 치렀고 어린이날 어린이들 모아놓고 만화책 불싸지르던 곳도 나였고 각종 규탄대회나 큰 행사는 어김없이 나였지. 그 추억들을 다 얘기하면 아마 날 샐 거고. 

잠실 올림픽 스타디움이 서면서 나는 과중한 업무에서 벗어났고 차제에 잊혀진 경기장이 되어 갔소. 성동벌판은 죄 건물숲으로 변했고 나는 도심에 자리잡은 거대한 장애물 정도로 인식이 되기도 했지. 내 이름은 ‘동대문운동장’으로 바뀌었고 내 안에서 풍물 시장도 열렸다가 그냥 주차장으로 쓰자는 말도 있었다가, 이제는 운동장이 아닌 ‘동대문 역사문화공원’이라는 전혀 다른 이름으로 그 모습도 변한 채 남아 있지. 그래도 가끔은 추억한다오. “안녕하십니까 여기는 성동원두 서울운동장입니다.”를 부르짖던 아나운서들의 멘트와 온 서울 장안을 울릴 것 같던 환호 소리, 그리고 수십년 지겹게 봐왔던 일장기 대신 태극기를 들고 입장하며 눈물 흘리던 사람들의 그 상기된 얼굴들.


tag :
Viewing all 497 articles
Browse latest View live